2001년 10월 경기 용인시 기흥읍의 삼성 반도체 공장. 세계적인 경기 침체와 미국 9·11테러의 여파로 반도체 산업 역시 극심한 불황에 시달리던 때였다.
삼성전자 메모리사업부 황창규(黃昌圭) 사장은 대강당에 차장급 이상 간부 500여명을 소집했다. 그리고는 ‘반도체 산업의 과제와 전망’을 주제로 직접 작성한 자료를 들고 강연에 나섰다.
“메모리반도체는 사양 산업이 아닙니다. 전자제품의 디지털화와 모바일화가 급속히 진전돼 수요가 늘어날 것입니다. 특히 삼성전자는 한발 앞선 제품 개발과 기술 차별화로 다시 한 번 도약할 수 있습니다. 모두가 합심해 올해 말까지는 적자에서 벗어납시다.”
대기업을 지휘하는 최고경영자(CEO)들은 기획에 강한 ‘참모형’과 생산현장을 잘 아는 ‘야전사령관형’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그룹 총수의 참모격인 기획실장 출신의 손길승 SK회장(왼쪽)과 이공계 출신으로 연구개발 및 생산을 이끌어온 황창규 삼성전자 메모리사업부 사장. -동아일보 자료사진
이날 장장 4시간이 넘게 진행된 강연에서 황 사장은 국내외에서 수집한 정보와 자료들을 분석해 메모리 산업을 전망하고, 불황 타개를 위한 전략을 제시했다. 임직원들에게 반도체 산업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고 적극 동참하도록 설득했음은 물론이다. 삼성전자는 2001년 3·4분기(7∼9월) 반도체 부문에서 3800억원 적자를 냈으나 2002년 1·4분기(1∼3월)에 9900억원 흑자로 돌아섰다.
그 자신이 연구원으로서 세계 최초로 256메가D램을 개발한 황 사장은 첨단기술 산업의 현장을 잘 알고, 임직원들을 직접 독려하는 ‘야전사령관형’에 속한다. 지금도 중요한 연구 프로젝트가 있을 때는 연구원들과 술자리를 함께하며 토론을 즐긴다.
▽참모형이냐 야전사령관형이냐=대기업의 창업주를 비롯해 한국의 개발 연대에 기업을 이끈 최고경영자(CEO) 가운데에는 산업현장에서부터 성장한 ‘야전사령관형’이 많다.
LG석유화학 성재갑(成在甲) 회장도 대표적인 ‘공격 앞으로’형. 1989년 당시 럭키석유화학 사장에 임명된 뒤 45만t 규모의 나프타분해공장(NCC)을 최대한 빠른 시간에 완공하라는 임무를 받았다. 지금 공장이 들어선 전남 여수시 용성단지는 당시만 해도 절반은 바다, 절반은 갯벌이어서 매립을 하고 공사를 해야만 했다.
성 회장은 바닷가 현장에 캠프를 마련해 인부들과 함께 먹고 자며 건설을 지휘했다. 사장이 직접 장화를 신고 뛰어드니 직원이나 인부들도 꾀를 부릴 수가 없었다. 결국 너나 할 것 없이 땀을 흘리며 동참해 예정된 기간의 절반인 1년 6개월 만에 공장을 완공하는 신기록을 세웠다.
반면 그룹의 종합기획실이나 재무통 출신 중에는 참모형 CEO가 많다. 삼성그룹 이학수(李鶴洙) 구조조정본부장이나 ㈜LG 강유식(姜庾植) 부회장, SK 손길승(孫吉丞) 회장 등은 모두 그룹 비서실이나 기획실 출신으로 치밀한 논리와 종합적 분석력으로 총수를 보좌해 왔다.
대한항공 심이택(沈利澤) 사장 역시 총수 일가의 참모 출신. 심 사장은 기획, 국제업무, 자재, 항공우주 등 거의 모든 분야를 섭렵했으며 500MD헬기, F-5전투기, UH-60헬기 생산 등 각종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완수해 주목을 받았다. 1999년 4월 대한항공 화물기 중국 상하이(上海) 추락 사고로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이 “대한항공에 전문경영인이 나서야 한다”고 지적하자 당시 조중훈(趙重勳) 회장의 최측근이었던 심 사장이 전면에 등장했다. 지금은 대한항공의 5개 사업본부 사장들을 지휘하는 총괄 사장이면서 경기 김포시 본사에서 조양호(趙亮鎬) 회장을 근접 보좌하고 있다.
심 사장은 5개 본부 사장들에게도 “현장에서 뛰라. 그리고 실적에 조급해 하지 말고 선진 경영 문화를 만들어 다음 사장에게 물려줄 큰 꿈을 가지라”며 ‘참모형’ 충고를 아끼지 않는다.
▽직관력과 리더십이 CEO의 가장 중요한 덕목=대부분의 CEO들은 야전사령관일 수밖에 없다. 현장을 뛰지 않고는 CEO로서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뿐 아니다. 수많은 정보를 걸러 미래를 통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져야 한다. 삼성 이건희(李健熙) 회장이 여러 조사에서 가장 존경받는 CEO로 떠오르는 비결은 다가오는 미래에 대한 뛰어난 통찰력, 직관력 때문이다.
헤드헌팅업체 유니코 서치의 김호종(金浩鍾) 이사는 “최근 CEO의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인재들을 확보하고 이들이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하는 리더십이 주목받고 있다”고 말했다. 핵심 인재들의 감성을 자극해 창의력이 발현되도록 하는 감성 리더십, 직원들의 기(氣)를 살려 최대한의 능력을 발휘하도록 하는 기 리더십, 미래의 변화를 투시하는 직관의 리더십이 점점 중요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신연수기자 ysshin@donga.com
최호원기자 bestiger@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