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욱 고등과학원장은 어린 시절 일본 히로시마의 원폭을 목격한 후 가지게 된 자연과 과학에 대한 끊임없는 ‘관심’을 통해 중성미립자이론의 세계적 권위자가 됐다. -김미옥기자
《김정욱 고등과학원장(69)은 중성미립자이론의 세계적 권위자로 고등과학원 초대 원장을 맡아 이곳을 한국 기초과학연구의 중심으로 키워냈다. 그는 한국교육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영재교육의 방향을 제시하고 한국뿐 아니라 베트남 칠레 브라질 멕시코 아프리카 등 세계 각국의 과학기술 발전을 위해 자문활동을 하며 첨단 과학기술의 사회적 활용을 위해 힘쓰고 있다》
● 히로시마의 버섯구름
그는 지금도 1945년 일본 히로시마 하늘 위로 솟아올랐던 거대한 버섯구름을 선명하게 기억한다. 초등학교 5학년 때의 일이었다. 일본에서 태어나 히로시마에 살고 있던 그는 히로시마 인근의 사찰에서 그 장면을 목격했다.
폭격을 피해 온 학생들을 위한 임시학교로 사용되던 이 절에서 그날 아침 수업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간이었다. 어디선가 ‘번쩍’하는 빛이 스쳐갔고 폭음과 함께 절 건물의 요란한 흔들림을 느껴 밖을 내다보니 히로시마 상공에 거대한 버섯구름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절은 원자폭탄이 투하된 곳으로부터 약 9km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그는 “이 충격적인 사건, 그리고 9월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펼쳐져 있던 히로시마의 비참한 광경을 목격하면서 ‘과학’의 힘이 얼마나 엄청난지에 대해 일찍부터 깨달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때의 충격이 아니더라도 그는 어린 시절부터 유난히 자연에 관심이 많았다. 들판에서 곤충을 잡고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어린 시절을 보냈고 신기한 것들을 많이 볼 수 있는 박물관이나 수족관을 찾아다녔다. 그는 요즘도 여행을 가면 반드시 그 지역의 박물관 수족관 등을 찾아간다. 지금도 대전의 중앙과학관에서는 그를 최고의 관람객으로 꼽을 정도다. 이제는 이곳의 심의위원을 맡고 있을 뿐 아니라 경기 과천시에 건립될 예정인 대규모의 국립과학관(가칭)의 추진위원도 맡고 있다.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그를 자연과학으로 이끈 것은 자연에 대한 끊임없는 관심이었다.
● 해군사관학교 중퇴하고 서울대 입학
초등학교 6학년 때 한국에 온 그는 중고등학교 시절을 “그저 평범하고 재미있게 지냈다”고 말한다. 하지만 광복 직후인 이 시기 한국의 교육환경 속에서 그는 뒷날 자연과학자로 성장할 수 있는 기초를 닦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당시 교육환경에서 입시 준비의 부담이 요즘과 같이 크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학과 공부에 관계없이 자유롭게 보고 싶은 책을 볼 수 있었고 틈만 나면 운동장에 뛰어나가 운동도 할 수 있었다. 그는 “지금 일흔이 다 된 나이에도 30대의 건강을 유지하고 있다”며 “그 비결은 바로 그 당시에 열심히 축구를 했던 덕분”이라고 말한다. 대학 시절에는 서울대 문리대 육상선수로 활동하기도 했으며, 이렇게 다져진 몸으로 그는 요즘도 매주 일요일 북한산에 오른다.
당시에는 한국어로 된 좋은 책이 많지 않았는데, 다행히 일본어와 영어에 익숙했던 그는 주로 외국어로 된 책들을 통해 별다른 불편 없이 지적 욕구를 채워 나갈 수 있었다. 특히 마리 퀴리,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유가와 히데키(湯川秀樹) 등 세계적 과학자에 관한 책을 찾아 읽었다.
그는 6·25전쟁 중이던 1952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해군사관학교에 수석으로 입학했지만 1년 만에 중퇴하고 서울대 물리학과로 가게 된다. 그의 재능을 알아본 해사의 물리학 담당 교수의 조언도 있었지만 더 중요한 것은 자유롭게 공부하기를 즐겼던 그에게 상명하복을 중시하는 군대생활을 평생 지속한다는 것은 견디기 어려운 일이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당시는 서울대 역시 교육체계가 제대로 잡혀 있지 않았던 시기였다. 부실한 강의에 만족하지 못한 그는 물리학과 동료들과 스터디그룹을 만들어 학생들끼리 공부할 과제를 제시하고 함께 그 과제를 해결해 나갔다. 뒤돌아보면 대학 4년 동안 수업시간에는 배운 것이 별로 없었지만, 오히려 그런 환경이었기 때문에 자발적으로 창의력을 키우는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그렇게 공부를 하다 보니 공부의 폭이 넓어져서 “대학의 평가시험이란 것은 스스로 공부하는 내용의 아주 일부분에 불과했다”고 기억한다. 그는 그렇게 서울대를 수석으로 졸업했지만, 그 당시 스터디그룹을 제대로 지도해 줄 수 있는 교수가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을 지금도 가지고 있다.
● 물리학자의 길
대학을 졸업할 무렵 서울대에 부임한 조순탁 교수는 그에게 노트르담대로 유학 갈 것을 권했다. 명문대의 간판을 따라가기보다는 작은 규모의 대학에서 실력 있는 교수에게 제대로 지도를 받으며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학과 동기들이 하버드대 프린스턴대 등 일류대학으로 유학을 갈 때 그는 그 충고에 따라 노트르담대로 갔다.
노트르담대에서 조 교수가 추천해 준 월터 존슨 교수의 지도를 받으며 공부하던 그는 서울대 물리학과 동기인 약혼녀 강영자씨(현재의 부인·존스홉킨스대 교수)와 함께 공부하기 위해 대학을 옮겨야 했다. 노트르담대는 여학생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이때에도 명문대를 찾기보다는 자신이 관심을 가지고 있던 ‘약상호작용(weak interaction)’ 분야의 세계적 전문가인 에밀 고노핀스키 교수가 있는 인디애나대로 옮겼고, 고노핀스키 교수 아래서 박사학위 논문을 썼다. 김 원장은 “명문대의 간판을 좇기보다 이렇게 자신의 관심사에 따라 스스로 공부할 길을 찾아갈 수 있었던 것은 어렸을 때부터 스스로 공부를 해 왔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고노핀스키 교수는 훌륭한 학자였지만 당시 자신의 저서 집필에 몰두하느라 그를 지도할 여유가 없었다. 그는 다시 고노핀스키 교수로부터 펜실베이니아대의 헨리 프리마코프 교수를 소개받았고 그의 지도 아래서 중요한 업적을 내기 시작했다. 김 원장은 자신이 물리학에 대해 배운 것은 대부분 프리마코프 교수에게 배운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그를 존경한다. 지금도 작고한 프리마코프 교수의 강의 자료를 액자에 넣어 사무실에 걸어놓고 그 당시를 회상하곤 한다. 그는 프리마코프 교수와 함께 원자핵과 소립자를 같은 기법으로 다루는 방법을 개발해 물리학계의 주목을 받았고, 이 방법을 김-프리마코프 메서드(Kim-Primakov Method)라고 명명했다.
당시 펜실베이니아대에는 이휘소 박사가 젊은 교수로 같은 과에 재직하고 있었다. 그와는 매우 가까이 지냈을 뿐 아니라 같은 분야를 연구하고 있었기 때문에 학문적으로도 많은 도움을 받았다. 당시 주말마다 연구실에 나와 연구하는 사람은 이 박사밖에 없었다. 김 원장은 지금도 “이 박사만큼 열심히 하지 못했던 나를 질책한다”고 말한다.
그는 1966년 존스홉킨스대 교수로 부임해 1997년 한국으로 돌아올 때까지 그곳에서 교수로 재직했다. 그는 그곳에서도 통일장이론과 중성미립자에 관해 주요한 업적을 남겼다. 특히 1993년 출간된 저서 ‘물리학과 천체물리학에서의 중성미립자(Neutrinos in Physics and Astrophysics)’는 이 분야에서 가장 권위 있는 책으로 평가된다.
● 사회를 위하여
고등과학원 3층에는 바닥부터 천장까지 두 쪽 벽이 완전히 칠판으로 된 토론실이 있다. 누구나 토론할 거리가 생기면 그 넓은 칠판 앞에 나서서 자신의 생각을 설명하며 사람들과 토론을 한다. 이곳에서는 누가 누구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문제를 찾고 답을 탐구한다.
김 원장은 1997년 고등과학원 설립의 책임을 맡아달라는 요청을 받고 한국에 돌아와 초대 원장에 취임했다. 고등과학원은 기초과학 연구의 기반 마련을 위해 정부가 출연해 설립되는 연구기관이었다. 그는 고등과학원에서 그가 마음속에 그리던 이상적 교육을 실현하려 했다.
기초과학 분야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 중에서 우수한 사람을 선발해 2∼4년 동안 연구에 전념할 기회를 제공하는 고등과학원은 일종의 영재교육기관이었다. 그는 “우수한 교사의 지도 아래 학생들이 자율적으로 연구하고 토론하는 방식이 영재들에게 가장 효과적인 학습법”이라고 확신했다. 이것은 그가 어린 시절부터 해 온 학습 경험에서 나온 결론이었다. 더욱이 인류가 쌓은 지식이 거의 모두 인터넷에 공개돼 있는 이 시대에 주입식 암기식 교육은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또한 고등과학원뿐 아니라 어린이와 청소년들을 위한 효과적 영재교육 제도를 마련하기 위해 관계기관의 자문에 응하며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때로는 번잡한 공직에서 물러나 중성미립자 분야에 관한 논문과 저서의 집필에 몰두하는 생활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들 때도 적지 않지만, 사회가 그에게 거는 기대도 소홀히 할 수는 없다.
그는 이제 고등과학원이 이론연구와 계산뿐 아니라 실험까지 함께 할 수 있는 명실상부한 과학원이 되고, 한국에도 본격적인 기초과학연구소들이 곳곳에 세워지기를 기대하고 있다. 또한 세계은행이 개발도상국에 과학기술 발전을 지원하기 위해 만든 세계기초과학연구회, 미국이 베트남을 지원하기 위해 만든 베트남교육재단 등에서도 책임을 맡아 인류가 과학기술을 유용하고 효율적으로 이용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그를 필요로 하는 곳은 이미 한국만이 아니다. 일흔이 다 된 지금까지도 그는 자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해 전 세계를 돌며 자연과학을 전파하고 있다.
김형찬기자·철학박사 khc@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