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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칼럼]최진규/"책 때문에 화내서 미안해"

입력 | 2003-08-04 18:47:00

최진규


주말이면 아이들과 함께 충남 서산의 시립도서관을 찾곤 한다. 도서관에서 아이들은 어린이 열람실에 들러 마음에 드는 책을 골라 열심히 읽은 후, 집에 가서 읽을 책까지 대출해 돌아온다. 필자는 도서관 근처에 살다 보니 평소 아이들에게 책을 선물하지 않는 편이다. 읽고 싶은 책은 도서관에 얼마든지 있으니 굳이 책을 사줄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아이들 용돈은 대부분 도서상품권으로 주기 때문에 자신들이 필요한 책은 얼마든지 사볼 수 있다.

그런데 며칠 전 딸아이의 책장에 새 책으로 보이는 역사전집 50여권이 꽂혀 있었다. 궁금한 마음에 책을 펼쳐 보니 역사적 사실을 재미있는 이야기에 다양한 그림까지 곁들여 아이들이 흥미 있게 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마도 가깝게 지내는 사람들에게 얻어왔나 보다 생각했다. 다음날 아침식사를 하며 내내 어색한 표정을 짓던 아내가 어렵게 말을 꺼냈다. 책의 내용이 너무 좋아 사전에 나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 할부로 책을 구입했다는 것이다. 순간, 시간만 나면 아이들에게 책을 읽히려고 수시로 도서관을 찾는 남편에게 한마디도 상의하지 않은 것이 괘씸했다. 우두커니 서있던 아내에게 화난 표정으로 다시 돌려주라는 말을 던진 후 집을 나섰다. 평소 유난히 책을 좋아하던 딸아이가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퇴근 무렵이 되어 컴퓨터의 편지함을 살펴보니 e메일 한 통이 도착해 있었다. 딸아이가 보낸 편지였다. “아빠, 저 맏딸이에요. 아빠, 그 책 그냥 두시면 안 되나요? 저 그 책 너무 좋아요. 몇 권 읽어 보니 모르던 역사를 새롭게 알 수 있어 좋았어요. 아침에 아빠가 엄마에게 하시는 말씀을 듣고 저 너무 슬펐어요. 내 수준에 맞는 책을 골랐다 싶었는데….”

아내가 큰맘 먹고 할부 책을 샀을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고, 그 정도는 아내 혼자서 결정해도 될 일이었다. 눈치 빠른 딸아이는 e메일을 통해 서둘러 엄마, 아빠 사이에 화해의 다리를 놓은 것이다. 평소 딸아이에게 책의 소중함을 강조하던 아빠의 모습이 부끄러워진 하루였다.

최진규 충남 서령고 교사 · 충남 서산시 동문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