촬영협조=누브라코리아, 모델 소윤, 스타일리스트 정지혜
2일 오후 11시30분 한 케이블 홈쇼핑 채널의 접착식 실리콘 브래지어 판매 현장. 등을 다 드러내게 입는 홀터넥 블라우스, 어깨끈 없이 가슴과 배를 꽉 조이는 튜브톱 원피스를 입은 외국인 모델들이 흐느적거리며 춤추고 있다. 팔과 다리의 움직임을 최대한 절제하는 대신 몸통을 흔들어 등과 가슴을 강조한다. ‘자 봐, 이렇게 가슴이 커 보이는데도 브래지어 끈이 안 보이지?’라고 온 몸으로 선전하는 것 같다.
호스트 1: 자, 이제 볼륨 있고 아름다운 가슴이 미의 가장 큰 기준이 됐어요.
호스트 2: 이걸 붙이면 가슴선에 골짜기가 생기니까 너무 만족스럽고요, 자신감이 생기더라고요.
호스트1: 소비자들을 보면요, 아가씨들도 많지만 출산 경험이 있는 주부들도 참 많아요. 출산 후 쪼그라든 가슴을 보며 ‘수술해야지…’ 생각했다가 이 제품을 보고 마음을 접었대요.
호스트2: 저희 어머니는 “너희는 정말 좋은 세상에 태어났다”고 말씀하시던걸요. 호호.
같은 시간 또 다른 홈쇼핑 채널. 두 명의 쇼핑 호스트와 한 명의 주부 탤런트가 접착식 실리콘 브래지어를 팔고 있다. 쇼핑 호스트는 “매진이 임박했다”며 흥분한다. 탤런트는 “처녀 때 입던 섹시한 드레스를 다시 입게 돼 행복하다”며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떴다. 이날 방송 시간인 50분 동안 준비된 물량 2000개가 동이 났다.
● ‘실리콘 밸리’를 위한 세레나데
접착식 실리콘 브래지어가 올 여름 패션계를 달구고 있다. 동양인은 체형 탓에 선천적으로 가슴과 가슴 사이에 골이 잘 형성되지 않는다. 이 브래지어는 양 가슴에 접착성이 강한 실리콘을 붙이고 두 가슴 사이를 여밈 장치로 조이면 ‘계곡’이 생긴다는 ‘실리콘 밸리’의 꿈을 팔고 있다.
접착식 실리콘 브래지어는 올해 처음 등장했다.
가슴 절제수술을 받은 환자들을 위한 의료용 실리콘 보형물을 만들어온 미국의 브라젤사가 올 초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국제 란제리쇼에 ‘누브라’를 출품한 것이 계기. 국내에서는 6월 11일 우리홈쇼핑을 통해 소개되면서 붐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첫 방송에서 분당 450건씩 문의가 들어와 50분 만에 3억5000만원어치가 매진됐다. 7월 말까지 매출액은 25억원. 우리홈쇼핑 머천다이저 전미선 대리는 “13만9000원의 고가에 비수기임을 고려하면 대박”이라고 말했다.
6월 말부터 7월 말 사이 LG홈쇼핑, CJ홈쇼핑, 현대홈쇼핑, 농수산홈쇼핑 등 홈쇼핑 5개사 모두가 ‘차밍스킨브라’ ‘매직브라’ ‘누스타브라’ 등 각기 다른 접착식 브랜드로 시장에 합류했다. 7월 말까지 LG홈쇼핑은 총 50억원, CJ홈쇼핑은 20억원의 매출을 기록하는 등 히트 상품으로 떠올랐다.
인터넷 쇼핑몰의 경우 LG e숍의 7월 마지막 주 ‘금주의 검색어’ 1위는 ‘브라’였다. 브래지어가 검색어 1위를 차지한 것은 이번이 처음.
누브라코리아의 이기은 부장은 “과감한 패션을 즐기는 20대 서울 강남지역 여성들을 타깃으로 생각했는데 40, 50대까지 전국적인 관심에 놀랐다”고 말했다. 7월 말까지 ‘누브라’의 매출액은 총 90억원.
● 2003년의 도발-가슴을 조립한다
가슴이 돋보이는 대표적 스타들,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배우 캐서린 제타 존스, 가수 머라이어 캐리, 탤런트 김혜수, 배우 파멜라 앤더슨, 가수 브리트니 스피어스, 골프 선수 박지은. 동아일보 자료사진
“샤넬 드레스를 입어도 가슴 사이에 ‘계곡’이 생기질 않아요. 이제 아이도 유치원에 들어갔으니 다 키운 셈이고 사교 모임을 통해 제 생활을 찾고 싶은데 위축되기 싫거든요.(주부 A씨·34·서울 압구정동)
“가슴이 홀쭉해 보이면 왠지 능력 없어 보이더라고요. 운동도 안하고, 마사지도 안받고 왠지 자기 관리에 소홀한 것 같아서요. 발육 상태가 좋은 신세대들한테 뒤지는 것 같고요. 볼륨 있는 가슴을 갖는 게 능력처럼 느껴지는 시대 아닌가요?”(홍보대행사 근무 B씨·36)
이 불황의 여름 화두가 왜 가슴인가. 그것도 실리콘 덩어리를 붙였다 떼었다 하는 ‘조립식 가슴’인가?
올해의 ‘큰 가슴’ 바람은 국내외 패션 브랜드 모두 ‘섹시함’을 화두로 내세운 데 한 원인이 있다. 업체들은 이 같은 마케팅 개념에 따라 특히 가슴과 등선이 깊게 파인 옷을 유행시켰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가슴의 볼륨이 고스란히 나타날 수밖에 없다. 결국 아담 사이즈가 아니라 큰 가슴이 ‘미덕’일 수밖에 없어졌다.
또 다른 분석은 경제 사회적 환경이 실리콘 ‘덧가슴’을 권한다는 것이다.
부산 부경대 패션디자인학과 오희선 교수는 “의상사에 비춰 가슴은 모성애, 따뜻함, 안락함 등을 주는 심리적 효과를 갖고 있다”며 “지금은 경제 불황 등으로 사람들의 심리가 위축돼 있어 풍만한 가슴이 부각될 수밖에 없는 시기”라고 분석했다.
시대적으로도 전시(戰時) 등 사회가 불안정하고 정상적인 가정생활을 영위하기 힘들었던 상황에서는 큰 가슴이 선호됐고 문명권의 안정된 사회 또는 교양이 중시되는 시기에는 가슴을 감추려는 성향이 강했다는 것. 현재는 국내의 정치 경제적 문제뿐만 아니라 북핵 문제, 이라크 전쟁 등 국제적 갈등양상이 ‘큰 가슴 시대’를 열었다는 다소 거창한 분석까지 나온다.
또 다른 사회문화적 관점에서 오 교수는 “올여름, 운동 인구가 크게 늘어나고 미용 문신이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은 여성들이 옷을 통한 몸이 아닌 몸 자체를 드러내고 싶어 하는 심리를 반영하는 것으로 몸이 화두가 되는 시대가 본격화하고 있음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연예인들의 누드 열풍, 모 가수의 가슴 확대 수술 논란 등 연예인들의 몸을 소재로 한 화젯거리가 잇따라 등장했다는 점도 여성의 가슴이 시대의 중심화두라는 점을 드러내고 있다는 분석이다.
신영와코루가 세계 12개 도시 여성의 체형을 조사해 지난해 말 발표한 바에 따르면20∼40대의 한국인 응답자 149명이 꼽은 이상적인 몸매의 여성은 탤런트 김혜수, 슈퍼모델 이소라, 누드모델 이승희 순이었다. 이들에겐 볼륨있는 가슴을 갖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러한 요인에 가슴을 크고 둥글어 보이게 하는 접착식 브래지어가 주목을 끌게 됐다는 분석이다.
● ‘그들 앞의 나’와 ‘그 앞의 나’
접착식 실리콘 브래지어 이전에도 탐스러운 가슴을 향한 여성들의 소망은 시대마다 각기 다른 창조물을 빚어냈다. 소비자들의 취향은 브래지어 디자인에 반영돼 왔다.
란제리업체 비비안의 양승남 팀장은 “브래지어 안쪽에 패드를 넣는 스타일이 국내에 처음 등장한 것은 1990년대 중반”이라고 말했다. 비비안의 경우 브래지어 안쪽에 끼워 넣는 보형물인 패드가 부직포(1995년)에서 시작돼 식물성 글리세린이나 오일을 넣은 워터패드(1999년), 공기로 채운 에어패드(2001년), 작은 알갱이 15만개를 넣어 채운 스킨볼륨패드(2003년)로 발달해 왔다.
이 업체가 지난해 1000명의 20∼40대 여성을 대상으로 한 설문 조사에서 55.2%가 가슴을 커 보이게 하는 패드가 들어간 브래지어를 한 개 이상 구입했으며 68.7%가 앞으로도 패드가 들어간 브래지어를 구입할 예정이라고 답했다.
경제적 여유가 있으면 수술을 택한다. 전통 브래지어나 접착식은 눈속임은 될지언정 ‘목욕탕 거울 앞의 자신’까지 속일 수 없고 ‘불특정한 다수 앞의 나’가 아닌 ‘그 앞의 나’를 생각하기 때문이다. 가슴성형은 1990년대 중반부터 보편화됐다.
서울 압구정동 미고성형외과 윤원준 원장은 “‘큰 가슴’의 기준 자체가 크게 바뀐 것 같다”면서 “과거 B컵 정도면 크다고 여겼지만 현재는 C컵은 돼야 ‘큰 가슴’ 축에 끼워 준다”고 말했다. 윤 원장은 “‘몸매가 예뻐야 미인’으로 여기는 추세가 강해지면서 특히 옷 맵시를 낼 수 있는 가슴에 관심이 모아지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서울 혜화동의 성형외과 김현수 원장도 “요즘에는 체형에 맞는 사이즈를 권해도 ‘옷을 입었을 때 티가 나도록 크게 해 달라’고 요구하는 가슴성형 환자가 대다수”라고 말했다. 김 원장은 요즘 환자들을 △원래 가슴이 작아 175∼200cc의 보형물을 주입하는 20대 △출산과 수유로 모양이 변해 250cc까지 주입해 달라고 요구하는 대담한 30대 △상담과 수술 후 관리에 철저하고 원하는 보형물의 양에 개인차가 심한 전문직 여성으로 분류하고 있다.
한편 서울 강남 엔제림성형외과는 1994과 2003년을 비교하면 가슴에 삽입하는 보형물의 크기가 평균 135cc에서 265cc로 두 배 가량 늘어났다고 발표했다. 200∼250cc면 성인 남성의 손으로 쥐었을 때 손가락 사이사이로 살이 삐져나오고도 남는 정도의 크기다.
김현진기자 brigh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