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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의 나무]황병기 이화여대 명예교수

입력 | 2003-08-11 18:12:00

단 하루도 쉬지 않는 연마를 통해 가야금 명인의 반열에 오른 황병기 교수는 고대 한국예술에 대한 재발견을 통해 현대 한국음악의 새 경지를 열어가고 있다. -박주일기자


《한국을 대표하는 가야금 명인이자 국악 작곡가인 황병기 이화여대 명예교수(67)는 한국전통음악의 계승과 발전을 이끌고 있는 국악계의 상징적 인물이다. 그는 조선시대 음악을 바탕으로 고대 한국인의 예술정신을 되살린 가야금 곡 창작과 연주를 통해 한국음악의 새로운 방향을 개척, 국악계 안팎의 존경을 받고 있다.》

● 가야금 소리

“둥∼.”

처음 들어보는 소리가 소년 황병기의 가슴을 뒤흔들었다. 국사교과서에서 이름만 들어봤지 아직까지 세상에 전해지리라고 생각조차 못 해 봤던 ‘가야금’이란 악기였다. 당시 중학교 3학년생(1951년)이었던 그는 하굣길에 고전무용연구소에서 김철옥 선생의 가야금 소리를 처음 들었다. 그 후 그는 그 첫 소리에 매혹돼 지금까지 가야금을 손에서 놓지 못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좀더 본격적으로 가야금을 배우기 위해 국립국악원을 찾아갔다. 마침 국립국악원은 1951년 피란지인 부산에서 설립돼 용두산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는 이곳에서 아악의 권위자인 김영윤 선생에게 아악을 배웠고, 이어 가야금 산조의 대가인 김윤덕 선생에게서 민속음악을 배웠다. 그 전까지만 해도 가야금은 아악과 민속음악으로 완전히 나뉘어 있어 가야금을 배우려면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했다. 황 교수는 양쪽의 가야금을 모두 익힐 수 있었던 첫 세대였다.

1953년 서울로 돌아온 그는 매일 학교에 갔다가 하굣길에 국립국악원에 들러 가야금을 배우고 집으로 돌아오는 일상을 반복했다. 종로구 계동 입구에 있던 집에서 1∼2분 거리에 국립국악원이 있었다. 서울대 법대에 입학한 후에도 졸업할 때까지 똑같은 일상이 이어졌다. 그리고 처음 가야금을 배우기 시작한 후 지금까지 그는 “단 하루도 가야금 연습을 하지 않고 지나친 적이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가 음악을 업으로 삼기로 마음먹은 것은 거의 마흔 살이 다 돼서였다. 대학입시를 치를 때도 음악대학은 전혀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다. 가야금은 그저 좋아하는 취미였을 뿐이라는 설명이다. 수학을 좋아해서 자연과학을 전공할까 고민하다가 안정된 길을 찾아 법대에 입학했다.

그런데 고등학교와 대학교 때 두 차례에 걸쳐 전국국악콩쿠르에서 1등을 하면서 국악계에 그의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1964년 국립국악원의 해외공연에 가야금 독주자로 참여하면서 국악과의 인연은 더욱 깊어졌다. 그러는 사이에도 그는 극장, 영화사, 화학공장, 출판사 등을 거쳐 가며 다양한 일을 해왔다. 하지만 국악인의 길을 선택하게 된 중요한 계기는 따로 있었다. 1965년 미국 하와이에서 열린 ‘20세기 음악예술제’에 동양의 대표적 작곡가로 초청돼 호평 받고 그의 음반이 미국에서 출간돼 음악전문지 ‘스테레오 리뷰(Stereo Review)’와 ‘에스노뮤지컬러지(Ethnomusicology)’로부터 격찬을 받았던 것.

1974년 이화여대에 국악과가 설립되면서 교수로 초빙되자 그는 고심 끝에 드디어 국악인의 길을 자신의 업으로 받아들인다. 20여년 동안 가야금에 대한 일관된 애정과 꾸준한 연습을 통해 그는 자연스럽게 국악계에서 위치를 인정받은 셈이었다.

● 전통에 뿌리박은 평범함

황 교수는 스스로 “어린 시절부터 별다른 꿈이 없는 그냥 평범한 사람이었다”고 말한다. 한국에 들어온 지 100여년밖에 안 된 ‘생소한’ 서양 악기보다는 이 땅에서 1000여년을 내려온 가야금을 배웠으니 평범하고, 훌륭한 국악인이 되어 민족예술을 부흥시키겠다는 거창한 사명감 때문이 아니라 그저 가야금이 좋아서 평생 가야금을 가까이하며 살았으니 평범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삶을 들여다보면 그의 ‘평범함’은 이미 범상한 평범함을 넘어선다. 그가 가야금을 시작한 것은 그저 가야금이 좋아서였지만, 다른 사람과 달리 단 하루도 가야금을 손에서 놓지 않고 연습했고, 그러는 사이 어느새 가야금 명인의 자리에 와 있었다.

그는 1962년 한국 음악사상 최초로 현대 가야금곡인 ‘숲’을 작곡했다. “자신들이 표현하고 싶은 것을 산조에 담았던 선생님들 세대와 달리 산조에서 벗어나 새로운 음악을 만들고 싶었어요.” 이 작품은 한국인의 정서를 잘 표현하는 것으로 유명한 시인 박두진의 시 ‘청산도’를 가야금 독주곡으로 만든 것이었다. 같은 해에 작곡한 가곡 ‘국화 옆에서’도 시인 서정주의 시에 곡을 붙여 만들었다. 그 만큼 그의 음악은 한국인 특유의 전통적 정서에 깊이 뿌리박은 현대한국음악이다.

그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가야금곡 ‘침향무(沈香舞)’는 이른바 ‘전통음악’이라고 전해지는 조선시대의 음악을 넘어 신라시대의 예술정신을 가야금곡으로 ‘재현’한 것이다. 그는 신라시대의 조각 회화 문양 등을 보며 그 시대의 문화에 심취했고, 그 문화를 다시 음악으로 표현해냈다. 그는 이렇게 가야금 선율의 새로운 경지를 열었다.

일찍이 김윤덕 선생(1916∼1978)에게서 정남희 선생(1905∼1984)의 가야금 산조를 배운 그는 45년 후인 1998년 ‘정남희제(制) 황병기류(流) 가야금 산조’(이화여대출판부)를 완성해 악보로 출간했다. 일정한 경지에 오르면 독자적으로 자신의 산조를 만들어 내는 것이 국악계의 관례이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정남희 선생의 산조는 아기자기한 맛보다는 장식 없이 가락을 조였다 풀었다 하여 긴장과 이완의 역동성을 추구하는 구성미가 매력적”이라며, 김윤덕 선생에게 전수 받은 가락 외에도 정남희 선생이 일제강점기에 냈던 음반과 월북 뒤 북한에서 만든 테이프 등을 구하고 여기에 자신이 만든 가락까지 삽입해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큰 스승’의 산조를 ‘완성’했다. 큰 스승의 산조라지만 가야금 명인 황병기의 손을 거쳤으니 자신만의 산조로 부름직도 하지만 황 교수는 그것을 굳이 ‘정남희제’라고 밝혔다. 그는 “이는 전통음악가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것”이라고 말한다.

● 전위에 선 국악인

그의 작품 중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이 ‘미궁’이다. 1975년 이 곡이 초연됐을 때 한 관객이 중간에 소리를 지르며 뛰쳐나가기도 했고, 17년이 지난 2002년에는 인터넷에서 ‘세 번 들으면 죽는다’는 괴기담이 떠돌기도 했다. 이 작품은 가야금이라는 전통적 재료를 사용하되 첼로의 활, 장구의 채, 거문고의 술대 등을 이용해 새로운 주법으로 연주한 음악에 신음하고 울고 웃고 절규하는 사람의 목소리를 곁들여 가야금의 아방가르드적 영역을 개척한 것이다.

이처럼 그의 음악은 그저 고집스럽게 옛 것에만 머물러 있지 않다. 그는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을 처음 들었을 때 “천지개벽하는 것 같았다”며 매년 정월 초하루 이 곡을 틀어놓고 한 해를 시작한다. 그런가 하면, “상식적으로 생각할 수 없는 파격, 그러면서도 생명력 넘치는 친밀감을 느끼게 하는 마력이 있다”며 재즈 색소폰 연주자인 존 콜트레인의 음악적 매력을 설명하는 데 열을 올리기도 한다.

그의 음악적 관심은 클래식부터 대중음악까지 자유롭게 넘나들고, 이 모두를 자신의 음악 속에 담아낸다. 스트라빈스키, 바르톡, 쇤베르크부터 스톡하우젠, 메시앙, 케이지, 펜데레스키, 카겔에 이르는 현대음악까지. 아악 중에도 가장 지루하다는 문묘악이나 종묘악부터 판소리, 시나위, 범패, 서도소리까지. 인도네시아, 티베트, 아랍 등 동양 각지의 음악과 호주, 뉴질랜드의 원주민 음악까지.

이렇게 해서 만들어 낸 그의 음악은 가장 고대적이면서도 가장 현대적인 음악으로, 한국음악의 영역을 무한히 넓혀간다. 그는 “절대로 서양음악의 작곡 방식은 따르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그가 지닌 예술정신의 폭은 동서와 고금의 한계를 뛰어넘는다.

이런 파격과 다양성을 깊은 감동의 경지로 이끌고 가는 것은 ‘비범함’을 포용하는 그의 ‘평범함’이 뒷받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그가 가장 즐겨 읽는 책인 ‘논어’의 정신과도 통한다. 그가 ‘논어’를 좋아하는 것도 그 안에 담긴 ‘평범’의 정신 때문이다.

한국의 대표적 국악인인 그가 세계에서 가장 전위적 예술가로 평가되는 백남준과 호형호제하며 가깝게 지낼 수 있는 이유도 바로 이렇게 비범과 평범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경지에 이르렀기 때문일 것이다.

김형찬기자·철학박사 khc@donga.com

▼국악曲의 아름다움은 풍상 겪은 古木의 美 ▼

우리 선비들에게 음악은 자연과 합일하기 위해 자기 개성을 해방시키는 것이었다. 따라서 음악 자체에만 몰두하는 것은 오히려 금물이다. 거문고는 오동나무 판에 명주실을 걸어놓은 한갓 물건이니, 이로써 귀에 듣기 좋게 하기만 바라는 것은 저속한 일이었다. 도연명이 “오직 거문고(琴)의 정취를 얻기만 한다면 어찌 애써 줄 위의 음을 다루리요”라고 했듯이, 선비들은 소리 그 자체보다도 거문고가 주는 그 정취를 중시했다.… 국악곡의 미(美)는 일시에 피어나는 꽃의 미가 아니라 풍상을 겪어온 고목의 미와 같다. 국악곡은, 특히 선비의 음악이었던 정악은 젊은 날의 꿈, 환상, 동경, 기쁨, 슬픔과 같은 것에 구애되지도 않고 이런 것을 표현하지도 않는다. 이 모든 인간적 감정을 넘어서서 그들이 궁극적으로 추구한 영원한 진리의 세계, 즉 자연의 경지에 달해 있는 것이다. ‘도(道)는 자연에 따른다’고 하지만, 음악이야말로 자연에 따랐던 것이다.

황병기의 ‘깊은 밤, 그 가야금 소리’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