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전시]"와…" 그림 앞에서 말을 잃다…네덜란드 명화展

입력 | 2003-08-12 17:27:00


《97년 7월호 미국 시사 주간지 ‘타임’은 역사적으로 세계 경제의 호황 시대를 정리한 ‘최고의 시대들’이란 기사를 실었다.

인플레이션, 경제 성장률, 실업률 등을 비교해 17세기 이후 인류사에서 황금기로 기록할 만한 여섯 시대를 꼽았는데 그 중 최장기간 경기 호황을 누렸던 시대로 ‘네덜란드의 17세기’가 선정됐다. 네덜란드는 영국이 대제국을 건설하기 훨씬 전 상업을 중시하던 중상주의 시대의 패자(覇者)였다. 인구는 200만 명에 불과했지만 유럽 선박량의 5분의 4를 보유하고 있었고, 동인도회사를 앞세워 인구 중 절반인 100만 명가량이 아시아권으로 진출했다. 그들 중에 조선 땅에 표류해 13년간을 살았던 ‘하멜’도 있었다.》

○ 17세기 회화 혁명기 걸작 50점 전시

네덜란드 풍경화가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화가로 알려진 얀 판 호연의 ‘엘텐 근처 라인강에서 바라 본 풍경’((1653년). 종교화나 역사화에 국한됐던 서양회화는 17세기 네덜란드에 이르러 초상화, 정물화, 풍속화 등 다양한 장르로 확산됐다. 네덜란드의 다양한 풍경화는 80여년의 투쟁 끝에 독립을 성취한 사람들의 국가적 자부심과 신을 믿는 칼뱅주의자들이 신의 창조물로서 자연을 얼마나 사랑하고 경외했는지를 보여준다. 사진제공 덕수궁미술관

▼작품보기▼

1. 프란스 할스 - 남자의 초상
2. 아드리안 판 오스타더 - 여인숙의 농부들
3. 빌럼 헤다 - 정물
4. 피터 클라스존 - 바니타스 정물
5. 피터 드 호흐 - 안뜰에서 담배 피우는 남자와 술 마시는 여자
6. 발타사르 판 데어 아스트 - 조개와 꽃이 있는 정물
7. 헤리트 다우 - 램프를 든 젊은 여인
8. 얀 스테인 - 아픈 소녀
9. 아브라함 블루마르트 - 카리클레아로부터 승리의 종려가지를 하사받은 테아게네스
10. 헤리트 베르크헤이더 - 헤이그의 마우리츠하위스와 호프페이퍼 호수의 풍경
11. 얀 판 호연 - 얼텐 근처의 라인강에서 바라본 풍경
12. 렘브란트 판 레인 - 깃 달린 모자를 쓴 남자의 초상
13. 야콥 판 롸이스달 - 겨울 풍경
14. 페터 파울 루벤스와 그의 작업실 - 젊은 여인의 초상
15. 안소니 반 다이크 - 화가 퀸테인 시몬스의 초상

이 시기를 ‘황금시대’ (Golden Age)로 만들어낸 네덜란드인들은 경제적으로 풍요로웠으며 문화적으로도 융성했다. 가장 두드러진 분야가 회화였다.

신흥 부르주아들의 등장과 개인주의의 확산으로 욕망을 죄악시하지 않는 사회 분위기가 맞물려 그림은 최고의 문화상품으로 떠올랐다. 이전까지만 해도 종교화나 역사화에 국한됐던 서양회화는 17세기 네덜란드에 이르러 초상화, 정물화, 풍속화 등 다양한 장르로 확산됐으며 작품주제도 신에서 인간으로, 절대에서 상대로, 초월에서 일상으로 내려왔다. 이른바 회화의 혁명기를 연 셈이다.

렘브란트와 루벤스가 포함된 17세기 네덜란드 화가들의 작품 50점이 선보이는 ‘위대한 회화의 시대’ (15일∼11월9일 덕수궁 미술관)를 보는 감상 포인트는 단순히 거장들의 작품을 원화로 만난다는 차원을 넘어 이 같은 역사적 문화적 상상력을 수혈 받는 데 있다. 자본주의 질서 속에서 꽃 핀 17세기 네덜란드의 그림들을 통해 찬란한 문화의 토대는 물질의 풍요로움이란 자각과 함께 결국 시대를 빛나게 하는 문화적 상상력이란 자유와 관용임을 깨닫게 된다.

○ 종교화에서 풍속-정물-초상화로 장르 확산

전시장을 둘러보면, 각종 미디어와 설치작품들이 주류를 이루는 현대미술과는 또 다른 회화의 기본 정신을 만난다는 느낌이 문득 든다. 특히 꽃, 과일, 동물, 아침식탁 등을 그린 정물화들은 사진처럼 정밀하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단순히 대상을 보고 베낀 그림이 아니다. 현실에 존재하는 대상들이긴 하지만, 화가가 ‘철학’이라는 양념을 넣어 재창조한 것이다.

아브라함 미뇽의 꽃 정물화에는 피는 시기가 모두 다른 꽃들이 한꺼번에 활짝 피어 있다. 식사 후 식탁 정경을 보여 주는 빌럼 헤다의 그림에는 화려한 식기들 사이로 넘어진 유리잔이나 껍질을 벗기다 만 레몬이 어떤 이유로 갑자기 식사를 그쳐야만 했던 장면을 연상시키지만, 이 역시 실제 상황은 아니다.

덕수궁미술관 박수진 학예연구관은 “미뇽의 꽃 정물은 화려한 순간, 절정의 순간을 영원히 간직하고 싶은 인간 욕망의 표현인데 비해 헤다의 정물은 이와 반대로 영원한 행복이나 절정은 없다는 삶의 무상함을 표현하는 무언의 암시”라고 해석했다.

한편, 일상생활에서 마주치는 삶의 한 순간들을 그린 풍속화는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300여 년 전 이국땅을 여행하는 느낌을 갖게 한다.

○ 매춘부… 농부… 300년전 네덜란드 속으로

남자를 유혹하는 매춘부, 현관에서 손님을 맞는 가정주부, 선술집에서 떠들썩하게 술을 마시는 농부들, 얼음판에서 스케이트를 타는 서민들, 우아한 실내에서 음악을 연주하는 연인들, 마을 사람들이 둘러보는 가운데 이를 뽑는 의사와 환자 등 스냅사진처럼 캔버스에 포착된 일상은 시공을 초월해 공통적인 인간 삶의 희로애락을 보여준다.

이밖에 도시와 농촌의 다양한 풍경을 그린 풍경화들은 80여년 간의 투쟁 끝에 독립을 성취한 사람들의 국가적 자부심과 신을 믿는 칼뱅주의자들이 신의 창조물로서 자연을 얼마나 사랑하고 경외했는지 보여준다. 또 기존의 양식을 뒤집고 모델의 자연스러운 순간을 포착한 초상화 역시 시민계급의 등장이라는 사회적 힘을 느끼게 한다.

이번 전시작들은 헤이그 마우리츠 왕립미술관 소장품들이다. 왕실을 미술관으로 바꾼 이 곳은 소장품의 우수성과 보존성, 차별화된 소장 정책으로 유럽에서도 특색 있는 미술관으로 인정받고 있다. 이번 전시는 주한 네덜란드 대사관이 후원하며 포스코가 협찬했다. 02-779-5310


허문명기자 angelhu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