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어느 어린이날에 부모님과 남매들이 모여 가족사진을 찍었다. -사진제공 형난옥씨
숯불을 피우시고 곱창 같은 걸 손수 구워 자는 아이들을 깨운 다음 어미가 새끼에게 먹이를 물어다 먹이듯 여덟이나 되는 아이들 입에 구운 고기를 일일이 넣어주시던 아버지. 아이들은 졸린 눈을 비비면서도 날름날름 받아먹던 풍경. 과수원을 하던 우리 집 한밤중 풍경이다.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너의 희망이 무엇이냐/…/부귀와 영화를 누렸으면 희망이 족할까.’
이런 노래를 부르며 술이 거나하게 취해 들어오시던 아버지. 신문지에 둘둘 말아 지푸라기로 질끈 맨 안줏거리를 들고 오셔서 기분에 취해 연출하셨던 장면이기도 하다.
나의 아버지는 정이 많은 로맨티스트였다. 일흔이 되어 돌아가시는 날까지 몸져누우시는 날을 빼곤 하루도 술을 거르는 일이 없었지만 맛난 안주를 혼자 잡숫지 못하고 꼭 사와서 가족에게 먹이셨다. 음식을 손수 나눠 주시고 나면 평소 말씀이 별로 없던 분이 말씀을 꽤 많이 하셨다.
“눈이 보밴기라, 뭐든 벌로 보지 말고 야무지게 보면 허튼 것들에 보석이 있는 기라.”
“암 것도 모르고 살만, 살긴 편해도 사람살이가 아니제. 깨닫고 살아야 사람살이지.”
“배울수록 처신이 어려분기라. 알수록 고개 숙이고 살아야제.”
“나누어 주면 반드시 복을 받는 기라.”
나의 기억엔 이런 문구가 끝이 없다.
‘취중 잠언가’셨던 나의 아버지는 사는 데는 부러질지언정 구부러지는 법이 없이 곧으셨다. 학생운동을 했던 내가 80년 5월의 사태를 겪을 때 공무원이 된 작은아들 봐서 행정소송을 못하신 걸 너무 속상해 하셔서 오히려 내가 민망할 지경이었다.
그런 나의 아버지는 페미니스트는 아니셨다. 내가 ‘머스마’가 아니고 ‘가스나’인 것을 늘 서운해 하셨다. 그래서 난 아버지께 보여드릴 겸 ‘가스나’여도 ‘머스마’한테 부끄럽지 않게 살려고 애썼다. 내 일에 골몰해 살다보니 어느 날 사는 모습을 보여드릴 아버지가 세상에 없었다.
아부지! 오늘 정말로 아버지가 그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