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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눈]제임스 메트레이/위기의 韓美동맹과 6자회담

입력 | 2003-08-13 18:36:00


정확히 반세기 전 당시 미국 국무장관 존 포스터 덜레스는 한미 군사협력 협상을 위해 서울을 방문했다. 1954년 1월 미 상원은 한미 상호방위조약(Mutual Defense Treaty)을 승인했다. 가능했다면 워싱턴은 한국을 방어하는 책임을 지기를 원치 않았을 것이다. 한국과 미국이 북한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해 동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차이는 한미간 ‘정략적 동맹’ 관계 속에서 양국간 마찰의 근본적 요인으로 지속돼 왔다.

워싱턴과 서울은 대북정책과 관련해 자주 이견을 보여 왔다. 50년대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미 대통령은 이승만 대통령이 정전협정을 준수하도록 하기 위해 막대한 군사지원과 방위조약(defense pact)이라는 일종의 ‘뇌물’을 제안했다. 이 대통령은 54년 제네바 회담이 성과 없이 끝나자 무력통일을 위해 한반도에서의 전쟁을 원했다. 그러나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이를 거부했다.

60년대 박정희 대통령은 한미동맹을 군부독재 확립에 이용했다. 그러나 워싱턴은 한국에 대한 군사적 지원을 늘렸다. 북한의 침략을 막기 위해서 뿐 아니라 한국군의 베트남 참전을 위한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린든 존슨 당시 대통령은 68년 김신조 일당이 청와대를 습격하려 한 1·21사태와 북한의 푸에블로호 납치사건 이후 박 대통령의 대북 강경대응 요구를 거부했다.

70년대 지미 카터 당시 대통령의 주한미군 철수 계획은 한미동맹의 연약한 기반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한미간 동맹관계가 발전하기 시작한 것은 냉전이 끝난 뒤부터였다. 조지 부시 당시 대통령은 한국의 정책을 존중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한국의 대북 신뢰구축 방안(한국 내 미군 핵무기 제거 등)을 지지했다. 빌 클린턴 행정부도 이 같은 정책을 유지해 김대중 대통령의 햇볕정책을 전폭 지지했다.

그러나 2001년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이런 고무적인 한미동맹의 맥을 끊었다. 2002년 한미관계에서 다시 긴장이 고조됐다. 1월 부시 대통령은 북한을 ‘악의 축’으로 거명해 많은 한국인을 분노하게 했다. 5개월 뒤 미군 장갑차에 치여 한국 여중생들이 희생되고, 사건 용의자인 미군들이 무죄로 풀려나자 한국 내 반미감정이 들끓었다. 당시 한미 공조관계는 북한의 핵문제 해결 방안을 놓고도 의견 조율을 보지 못한 채 무너질 위기에 와 있었다.

북핵 문제를 평화롭게 해결하려는 한국의 노력은 미국의 방해를 받아왔다. 5월 워싱턴은 대(對)북한 보복성 조치에 대한 국제사회의 지지를 얻으려 했다. 부시 대통령은 5월 노무현 대통령의 방미 때 이에 대한 지지를 강조했다. 노 대통령은 한미동맹의 유효함을 재차 강조했지만 대북 경제제재와 군사조치에 대한 반대 입장을 거듭 밝혔다.

한국은 미국의 대북 제재에 반대한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했다. 부시 행정부는 비무장지대에서 미군을 옮기는 주한미군 재배치 계획을 발표했다. 한국인들은 미국이 북한에 군사공격을 가한 뒤 이어질 북한의 보복공격을 피하기 위해 미군을 옮기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7월 발생한 네 가지 사태는 노 대통령에게 독자적 외교만이 미국이 한국전쟁을 시작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길이라는 점을 일깨워줬다. 첫째, 평양은 미국이 대북 경제제재 및 해상봉쇄 등을 가할 경우 가혹한 보복행위가 뒤따를 것이라고 경고했다. 둘째, 북한이 폐연료봉에 대한 재처리 작업을 마쳤으며 소형 핵무기를 개발 중이라는 소식이었다. 셋째, 워싱턴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북핵 문제를 상정, 대북 경제봉쇄 조치를 취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비무장지대에서 한국군과 북한군 간에 총격전이 벌어졌다.

이 같은 한반도 내 긴장은 중국에도 걱정거리였다. 결국 주변국의 압력과 베이징의 설득노력으로 북한은 6자회담에 합의했다.

한국과 미국은 50년간 동맹관계를 맺고 있지만 그 어느 때보다 북한에 대해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다. 앞으로 북한과의 협상 진전 여부는 한미 양국이 어떤 관계 속에서 벌어진 틈을 좁히고 어떤 공유점을 찾아 나가느냐에 달려 있다.

제임스 메트레이 캘리포니아 치코 칼스테이트대 역사학부 학장

김정안기자 cred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