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프랑스 파리의 페르라셰즈 묘지에서는 한 여배우의 장례식이 열렸다. 리오넬 조스팽 전 프랑스 총리와 장 루이 트랭티냥, 카트린 드뇌브, 제인 버킨 등 유명 배우, 일반인 1000여명이 참석한 장례식 분위기는 무겁다 못해 음울하기까지 했다.
영화뿐 아니라 연극과 노래, 시 낭송에 걸쳐 두루 재능을 발휘했던 마리 트랭티냥(41·사진)의 장례식이었다. 리투아니아로 TV 드라마를 촬영하러 갔던 그는 지난달 27일 동거남에게 맞아 파리로 이송된 뒤 1일 뇌출혈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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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떠난 뒤 프랑스 사회는 허탈감에 젖어 있다. 유명한 프랑스 영화 ‘남과 여’의 주인공 장 루이 트랭티냥의 딸로 상류사회에서 성장했으며 존경과 사랑을 받았던 배우가 동거남의 구타라는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사망한 게 믿어지지 않기 때문. 폭력을 휘두른 남자는 프랑스에서 가장 인기 있는 록그룹의 하나인 ‘누아 데지르(검은 욕망)’의 리드 싱어 베르트랑 캉타(39)였다.
다른 선진 유럽국에 비해서 프랑스는 가정폭력 문제가 심각한 편이다. 여성의 10%가 남편이나 동거남의 폭력에 시달리고 있으며, 5일에 한 명꼴로 여성이 가정폭력에 의해 사망한다고 프랑스 언론은 전한다. 인접국인 스위스에서 가정폭력에 시달리는 여성은 6% 정도. 프랑스가 ‘마초(Macho·사내다운 남자)’를 높이 평가하는 라틴문화권에 속하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그러나 트랭티냥의 죽음은 프랑스 가정폭력 문제의 숨겨진 부분, 즉 화이트칼라와 상류층 및 지식인 사회의 어두운 면을 드러냈다는 점에서 더욱 충격을 주고 있다. 여성단체인 ‘여성 연대를 위한 국민동맹’의 마리 도미니크 쉬르맹 회장은 “트랭티냥의 희생은 가정폭력이 일부 저소득층의 문제라는 고정관념을 깼다”며 “지식인이며 독립적인 페미니스트 여성도 희생자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유력지 르몽드도 “가정폭력이 저소득층이나 실업자, 알코올중독자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드러났다”고 강조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트랭티냥의 동거남 캉타는 이라크전 반대 등 각종 평화운동에 앞장선 좌파 평화주의자였다.
파리=박제균특파원 phar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