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프로야구 최고의 풍운아 백인천씨. 최근 롯데 감독직에서 물러나며 또 다시 지도자로서 영욕이 교차했지만 야구에 대한 열정만큼이나 표정은 여전히 밝다. 장환수기자
한국 야구 100년사를 통틀어 숱한 풍운아가 명멸했지만 백인천씨 만큼 극명하게 영욕이 엇갈린 이는 드물 것이다.
19세의 나이에 일본으로 건너가 32세 때 퍼시픽리그 타격왕에 올랐고 감독 겸 선수로 뛴 39세에는 여태 깨지지 않고 있는 국내 유일의 4할 타자(0.412)가 됐다. 지도자로선 90년 LG의 창단 감독으로 한국시리즈 정상에 오르는 감격을 누리기도 했다.
그러나 언제나 영광은 잠시 머물다 가는 바람 같았다. MBC LG 삼성에 이어 며칠 전 중도 해임된 롯데까지 4번의 감독생활 중 단 한번도 계약기간을 채운 적이 없었다. 워낙 개성이 뚜렷한 탓에 프런트와의 갈등을 피하지 못했고 선수단 내에선 그의 카리스마에 반기를 드는 일까지 나왔다. 한국시리즈 우승 감독이 이듬해 그만둔 것은 그 뿐. 야구 외적으로는 사생활 문제로 법정에까지 섰고 고혈압으로 생명이 위독한 상황에 몰리기도 했다.
올해 나이 환갑. ‘거울 앞에 돌아와 다시 선 누님’처럼 이제 앞만 보고 달려온 자신의 인생을 돌아볼 나이. 서울 송파구 가락동에 있는 백구상사(일본 골프용품 수입판매업체)에서 만난 그가 밝히는 파란만장한 야구인생 반세기를 들어본다.
1962년 도일할때의 모습.
● 꿈★은 이루어진다
경동중학교 2학년 때였다. 어렵사리 구한 일본 야구잡지에서 영웅 나가시마 시게오(현 일본 대표팀 감독)를 봤다. 그가 대학을 졸업하고 일본 최고의 명문구단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한다는 기사였다. ‘이런 사람과 함께 야구를 해봤으면….’ 나도 모르게 독백이 흘러나왔다. 순간 머리에서 불이 났다. 한 선배가 “야, 임마 꿈 깨”라며 나의 뒤통수를 때린 것. 사실 그때 나는 별 볼일 없는 선수였다.
그로부터 5년 후. 꿈은 이뤄졌다. 경동고 2년 때인 60년 광복 후 서울운동장(현 동대문구장)에서 홈런을 때린 최초의 고교생이 된 나는 그 해 한일고교 초청경기 때 일본 도쿄 메이지 진구구장에서 2차대전 종전 후 고교생으로는 두 번째로 홈런을 날려 주목을 받았고 62년 일본프로야구 도에이 입단이 확정됐다.
이 때부터가 시련의 시작이었다. 해외 프로야구 진출 1호인 나에 대한 당시 주위의 인식은 냉담하기 짝이 없었다. ‘백인천이 돈에 팔려갔다’는 비아냥과 함께 매국노로 몰아붙이는 ‘혈서 편지’가 하루에도 몇 통씩 날아왔다. 현해탄을 건너면서 이빨을 깨물고 허벅지를 바늘로 찔렀다. 일본에서 성공하지 못하면 다시는 한국에 돌아가지 않겠다고. 결국 75년 퍼시픽리그 타격왕(0.319)에 오르는 결실을 거둘 수 있었다.
● 영광과 좌절은 동전의 앞뒷면
‘하쿠(白)’라고 하면 일본 야구팬이면 모두 알 정도의 스타가 됐을 때. 마침 국내에도 프로야구 창설 움직임이 있었고 당시 이용일 한국야구위원회 사무총장으로부터 간곡한 제의를 받고 귀국을 결정했다.
결국 프로 원년인 82년 MBC의 창단 감독이자 선수로 20년 만에 고국 땅을 밟았다. 그리고 그해 나는 한물갔다는 평가를 비웃듯 4할 타자가 됐다. 그러나 83년 초 가정 문제로 팀을 떠나야 했다.
이때부터 이상하리만치 내 인생은 영욕이 교차했다. 비록 야구계를 떠나야 했지만 마흔이 넘은 나이에 재혼으로 새로운 인생을 설계했고 일본 친구들의 도움으로 백구상사를 창설해 사업에 전념할 수 있었다.
이후 잊혀질 만 하면 야구단에서 나를 불렀다. 90년에는 LG가, 96년에는 삼성이, 지난해에는 롯데로부터 부름을 받았다. 하나같이 위기에 빠진 팀이었다. 그러나 매번 감독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LG 시절엔 우승한 이듬해 원정경기 때 선수와 구단 직원이 숙소에서 함께 도박을 하는 것을 목격한 뒤 “부모가 새끼를 내하을 수 있나”며 스스로 사표를 냈다. 삼성의 암흑기인 90년대 중반엔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해 ‘폭식증(暴食症)’에 걸렸고 결국 고혈압으로 몸이 마비되는 병고를 치렀다.
● 내가 ‘실패한 지도자’라고요?
4번 모두 감독 생활의 끝을 제대로 맺지 못했지만 성적 부진으로 중도 해임되기는 롯데가 처음이다. 하지만 나는 내가 무능한 감독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야구의 신이 있다고 해도 롯데처럼 총체적 난국에 빠진 팀을 맡아 단기간에 성적을 낼 수는 없을 것이다.
나의 지도방식은 스파르타식이다. 스포츠는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하는 것이다. 피칭이든 타격이든 몸으로 익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피땀 나는 반복 연습이 필요하다. 나는 롯데 선수들에게 이를 강조했고 내년이나 내후년에는 좋은 결과가 나올 것으로 확신한다.
선동렬이 인스트럭터로 올초 호주 전지훈련 때 와서 한 말이 기억난다. 그는 “내가 롯데의 정식 코치라면 선수들을 반쯤 죽였을 것”이라고 했다. 역시 ‘열혈남아’ 호시노 센이치(현 한신 타이거스 감독)의 수제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24시간 야구 생각만 한다는 호시노는 나와 야구관이 일맥상통하는 절친한 후배다.
이제 다시 감독으로 현장에 복귀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프로와 아마를 떠나 내가 60평생 배우고 익힌 노하우를 후배들에게 전수해야 한다는 사명감만은 잊지 않고 있다.
▼백인천은 누구
△생년월일=1943년 11월27일
△체격=1m74, 77㎏(삼성 시절 폭식증으로 98㎏까지 나갔지만 반신마비로 1년여에 걸친 투병생활 끝에 완치된 뒤 다이어트에 성공, 허리 31인치)
△가족관계=재혼후 1남(현오가 중학교 2학년으로 골프 선수가 꿈)
△주요 경력=59년 이영민 타격상, 62년 대한민국 최우수선수상(대한체육회 선정), 유일한 한일 프로야구 동시 수위타자, 90년 한국시리즈 최우수감독상.
△지도자 생활=MBC 82~83년, LG 91~92년, 삼성 96~97년, 롯데 2002~2003년
장환수기자 zangpab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