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문화와 사상을 알리는 시민강좌를 20년간 주도해 온 오가와 하루히사 교수. -도쿄=조헌주기자
‘대관소당(大觀小堂).’
도쿄(東京) 중심부인 지요다(千代田)구 문예춘추사 부근의 연구실을 들어서려다 문 앞에서 멈칫했다. 버젓한 현판 대신 손으로 쓴 종이 조각이 붙어 있었다. 서너 평짜리 방이지만 세상 보기에 어찌 모자라더냐. 그런 실심실학(實心實學)의 정신과 닿아 있는 것만 같다.
“이게 제 보물입니다. 15만엔(약150만원)에 이런 보물을 얻다니.”
흐뭇한 표정으로 오가와 하루히사(小川晴久) 교수는 수년 전 LG상남언론재단이 펴낸 독립신문 영인본 6권을 쓰다듬더니 이내 ‘강의’에 들어갔다.
“광복절을 맞아 서재필 선생을 중심으로 한 독립협회 운동의 역사를 일본 시민들에게 알려야 할 사명감을 더욱 절실하게 느낍니다. 일본 정부와 대한제국 수구파가 독립신문을 폐간시킨 경위를 모르고서야 어찌 한반도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망국의 치욕, 피어린 독립항쟁의 역사를 잊고 눈앞의 일에만 넋이 팔린 듯한 한국인을 향한 말 같기도 하다. 1896년 4월 7일 독립신문 창간일을 기념해 ‘신문의 날’이 만들어진 일을 잠시 떠올리는 사이 그는 말을 이었다.
“독립신문은 당시 어려운 상황 속에서 지사(志士)들이 얼마나 치열하게 노력했는가를 그대로 보여 줍니다. 이걸 계몽할 필요가 있습니다.”
달포 전 와세다대 부근 작은 회의실에서 10여명의 청중을 상대로 ‘조선문화강좌’를 진행하는 모습을 보며 느꼈던, 학구열 넘치는 바로 그 청년이다. 20kg은 됨직한 가방과 보자기에서 책을 끝도 없이 꺼내 가며 ‘간도와 항일전쟁의 진실’에 대해 내리 두 시간 반을 설명하던 그때 그대로다. 그런 열정 없이, 일본 사회에서 인기 있을 리 없는 조선문화강좌를 어찌 20년을 이어오겠는가.
1984년 지명관(池明觀) 한림대 일본학연구소장 등과 함께 시작한 ‘조선문화강좌’를 현재까지 지키고 있는 이는 그밖에 없다. 한국의 문화와 사상과 역사를 배우자는 취지에서 1년에 여섯 번 열린다. 70대 할아버지, 20대 대학원생, 40대 주부 등 청중의 신분과 동기는 다양하다. 참가자는 그때마다 자료비로 1000엔을 낸다.
작년 강의 주제는 독립협회였다. 올해 주제는 ‘북조선의 양심과 토지’. 이유가 있다.
“문민정권이 들어섰던 93년 여름이었습니다. 북송 재일교포 가족에게서 자식이 강제수용소에서 살해됐다는 말을 듣고 너무나 충격을 받았습니다.”
60년대 대학시절 당시 ‘의식 있는’ 청년들이 그러했듯 북한 체제를 이상적인 사회주의국가로 옹호했고 북송사업, 즉 재일교포 귀국 사업도 당연한 일로 지지했던 그였다.
철부지 젊은 날에 대한 회오와 반성으로 그는 북한 민중의 인권 문제에 열성적으로 뛰어들었다. 94년 ‘북조선 귀국자의 생명과 인권을 지키는 모임’을 결성했다. 얼마 전 중국에서 탈북자 9명을 한국으로 망명시키려다 일본인 대표가 구속된 바로 그 단체다.
그가 한국과 만난 것은 18세기 북학파(北學派)의 원조로 통하는 실학자 홍대용(洪大容) 연구에서 비롯된다.
“대학원 시절 아르바이트가 끝나면 밤늦게 들르던 카레덮밥 집이 있었는데 주인이 어느 날 ‘이 책 봤는가’ 하며 내민 게 이 책입니다.”
1962년 일어 번역판 ‘조선철학사’였다. 카레 집 주인에 못 미치는 학문의 얕음과 홍대용의 실학사상을 접한 기쁨이 겹쳤다. 한국에 대한 관심은 훗날 연세대 국학대학원 유학으로 깊이를 더해 갔다. 도쿄대 교양학부에서 20여년 근무한 뒤 2001년부터 양명학을 비롯한 동아시아사상사 연구로 정평 있는 니쇼가쿠샤대에서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창립 126년째를 맞는 대학이다.
“제가 가장 존경하는 한국인은 이순신 장군이고 두 번째 인물이 서재필입니다.”
드물다. 일본 국적을 가진 사람으로서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을 만나기는. 그는 이순신을 조국을 구한 영웅으로서뿐만 아니라 전 생애에 걸쳐 실사구시의 이념을 실천한 완벽한 인물로 본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400년이 되던 1992년 그는 ‘임진왜란연구회’를 만들어 전란이 계속된 기간 만큼인 7년간 모임을 이끌었다. 도중에 두 번, 연구회원 10여명과 함께 이순신 장군이 활동했던 역사의 무대인 울돌목, 전남 진도의 용장산성 등 남해안 일대 전적지를 답사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연구실을 나서 사진을 몇 장 찍었다. 끈적거리는 도쿄의 여름 날씨를 탓하며 커피 체인점에 들렀다. 오가와 교수는 앉자마자 기억하기 힘들 만큼 많은 인명과 이론과 저서를 쪽지에 적어 가며 ‘제2교시 강의’를 시작했다.
“1937년 정인보 선생이 동아일보 문화면에 ‘양명학연론(演論)’을 60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그 시절에 정말 대단한 일이지요. 선생은 정하곡에서 시작해 이건창으로 이어지는 남인계열 강화(江華)학파 계보인데, 실학의 근본에 관해 인간 정신의 본질적인….”
이야기는 일제강점기 동아일보의 선구자적 정신과 역할에서 한반도 분단시대 한일 지식인의 할 일로 이어졌고 냉커피 속 얼음조각은 모두 물로 변해 있었다.
도쿄=조헌주특파원 hanscho@donga.com
▼오가와 하루히사 교수 약력 ▼
△1963년 도쿄대 동양사학과 졸업
△1969년 도쿄여대 조교수 거쳐 도쿄대 교양학부 교수
△1978년 연세대 국학연구원 유학
△1984년∼현재 ‘조선문화강좌’ 기획 및 강사 활동
△1992∼98년 임진왜란연구회
△2001년∼현재 니쇼가쿠샤(二松學舍)대 교수(동아시아사상사)
△저서=조선실학과 일본, 실사구시의 정신으로 시대를 밝힌다
(번역판·원제는 조선문화사의 사람들)
도쿄=조헌주특파원 hansch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