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수수와 사탕수수 밭 속 가느다란 길이었다. 한탄을 할 수도 후회할 수도 화를 낼 수도 없었다. 그저 다음에는 무슨 일이 벌어질까, 공포가 귓전에서 징-징- 울리고, 몸도 마음도 전류가 흐르는 것처럼 찌릿찌릿했다. 중국인 민가 앞을 더러 지나기는 했는데, 어떤 집에도 불빛은 없고, 찬찬히 들여다보니 문이 떨어져 나갔거나 창문이 깨져 있는 것 같았다. 누가 살기라도 하면 도움을 구할 텐데…없다…없다…아무도 없다…군인밖에 없다…귀뚤귀뚤 귀뚤귀뚤 매앰매앰 찌르르르릇 찌르르르릇, 벌레 소리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밀려가고, 또 다시 밀려오고, 울창한 숲 속 어디선가 숨을 죽이고 있을 부엉이가 부엉부엉 소녀를 부르듯 울었다.
뒤따라오던 아버지가 말을 꺼냈다.
“괜히 엉뚱한 생각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도망쳐봐야 아무 소용없어. 군인들 손에 다시 끌려와서, 총검으로 젖가슴 도려내고, 거기에 총 맞는 여자도 봤어. 아직 숨이 붙어 있는데 다른 여자들 보는 앞에서 불 질러 버렸어. 판자 위에 올려놓고 장작불로, 도중에 비가 내려서 불길이 좀 잦아들기에, 막대기로 쑤셔봤더니 시체에서 기름이 죽 죽 흘러나오더라고…지금도 갈비 먹을 때마다 떠올라.”
소녀는 7번방으로 들어가 잠옷으로 옷을 갈아입었지만, 허리끈을 어떻게 묶어야 할지 몰라 그냥 앞섶만 겹치고는 무릎을 껴안고 고개를 푹 숙였다. 양 옆 방에서 남자하고 여자의 목소리가 뒤섞여 들린다. 하아 하아, 헉 헉, 아아아아, 으으으윽…그 소리다, 엄마하고 그 남자가 매일 밤 하는 그거 소리가 틀림없다…다들 결혼한 건가? 아니면…뭐지?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지?
끼익 소리가 나면서 문이 열리고 모포 사이로 얼굴을 들이민 것은, 아까 그 군의관이었다. 군의관의 미간과 이마에는 깊은 주름이 파여 있고, 몹시 언짢다는 표정이었다.
“거기 누워 있어.”
소녀는 군의관의 말대로 이불 위에 반듯하게 누웠다. 이번에는 무슨 검사를 하는 거지? 또 거기? 아니면 가슴? 배? 소녀는 눈을 꼭 감았다…가슴 앞에 꼭 여민 두 손을 풀어 양 옆으로 내리고…앞섶을 벌리고…밀가루를 뿌리는 것처럼 손가락이 젖가슴과 배를 쓰다듬고…속바지가 무릎까지…발목에서 벗겨…옷감이 부딪치는 소리가 나고…무슨 소린가 싶어 눈을 뜨자, 군의관이 바지를 내리고 훈도시①를 푸는 중이었다.
①남자의 음부를 가리는 폭이 좁고 긴 천.
글 유미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