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7일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에서 베토벤 피아노협주곡 5곡 전곡 연주회를 갖는 피아니스트 보리스 베레조프스키. 힘과 기교를 겸비한 그는 ‘러시아의 젊은 사자’라는 별명으로 불린다. -사진제공 마스트미디어
《순수 연주시간만 3시간, 두 차례의 중간 휴식까지 포함하면 총 3시간반 이상이 걸리는 콘서트가 마련된다. '러시아의 젊은 사자'로 불리는 피아니스트 보리스 베레조프스키(34)가 하룻밤에 베토벤이 남긴 5개의 피아노협주곡 전곡을 한국 팬들 앞에서 완주한다. 순수 연주시간이 90분가량인 보통의 콘서트에 비하면 이번 연주회는 그 배를 꼭꼭 눌러 담은 셈. 판소리 8시간 완창 무대에 비교할 정도는 아니지만 청중에게 일종의 인내심까지 요구하는, 클래식 무대로서는 흔치 않은 기획이다. 9월7일 오후 4시 서울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
베레조프스키는 2001년 내한해 KBS교향악단과 사흘에 걸쳐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협주곡 전곡(5곡)을 연주하기도 했다. 총연주시간은 ‘베토벤 전곡’과 ‘라흐마니노프 전곡’이 비슷하지만 이번 연주에서는 하룻밤에 전부를 뚝딱 끝내버리는 더 어려운 일에 도전하는 것. 더구나 이번에는 직접 유라시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지휘할 예정이어서 ‘노동 강도’는 더더욱 크다. 베레조프스키는 당초 베토벤의 바이올린협주곡 D장조 피아노 편곡판까지 모두 6곡을 연주하겠다고 나섰으나 기획사측이 악단원과 청중의 피로를 감안해 간신히 말렸다는 후문이다.
베레조프스키는 타임워너 산하의 대형 음반사인 ‘텔덱’이 간판으로 내세운 ‘파워풀형’ 피아니스트. 쇼팽 슈만 라흐마니노프 라벨 등 시대와 장르를 가리지 않는 왕성한 앨범 목록을 자랑한다. 강건한 파워, 단단한 리듬감, 거대한 음량, 불 뿜는 듯한 명인기(名人技)가 그의 트레이드마크다.
이번 콘서트에서 그는 국내 최초로 이탈리아산 ‘파치올리(fazioli)’ 피아노로 연주할 예정이다. 스타인웨이의 독무대 속에 뵈젠도르퍼, 베히슈타인 등이 겨우 명함을 내밀 정도인 세계 피아노 시장에서 1978년 창립된 파치올리에서 만든 피아노는 상당한 주목을 받고 있다. 이탈리아의 일류 목공 장인과 기계공학자, 음향전문가, 기계공이 ‘프로젝트 그룹’ 형태로 모여 짧은 시간에 빚어낸 명작이 파치올리이기 때문이다. 한 음 한 음이 오래 지속되면서 서로 뚜렷이 구분되고, 강약 대조가 커 현대적 느낌을 주는 게 특징이다. 이 피아노는 라자르 베르만 등 기교와 힘을 겸비한 피아니스트들로부터 칭송받고 있다.
여기서 질문 하나, 왜 연주자들은 유독 ‘베토벤 전곡’ 연주를 선호하는 것일까.
베레조프스키의 이번 연주회 외에도 재미 음악가인 피아니스트 미아 정과 바이올리니스트 캐서린 조가 베토벤 바이올린소나타 전곡(10곡) 연주회를 9월 23, 25, 28일 서울 호암아트홀에서 가질 예정. 지난해에도 바이올리니스트 이경선과 피아니스트 신수정이 사흘 동안 베토벤 바이올린소나타 전곡을 완주한 바 있다. 2000년에는 피아니스트 김대진이 하루 두 차례 공연을 통해 베토벤 피아노협주곡 전곡을 연주했다. 첼리스트 이유홍과 피아니스트 김정원도 지난해 베토벤 첼로소나타 전곡(5곡)을 이틀 동안 주파했다.
많은 음악가들은 “베토벤의 음악이 갖는 진취적 성격이 도전욕구를 우러나게 한다”고 입을 모은다. 교향곡 5번의 성격을 ‘암흑에서 광명으로’라고 흔히 표현하듯 베토벤의 음악에는 유년기의 가혹한 환경과 귓병 등 온갖 악조건을 이겨낸 그의 삶이 그대로 녹아 있다. 그래서 베토벤의 작품 사이클(cycle)을 전곡 연주한 뒤 얻는 성취감은 다른 작곡가의 작품연주 때보다 훨씬 크다는 설명이다.
지난해부터 5년 예정으로 베토벤 피아노소나타 전곡(32곡) 연주 시리즈를 진행 중인 피아니스트 최희연(서울대 교수)은 “베토벤의 작품은 모두 개성이 강하면서도 전 생애에 걸친 내면의 변화가 반영돼 있어 전체를 다뤄보고픈 욕구를 강하게 불러일으킨다”고 말했다.
유윤종기자 gustav@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