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유명한 소설가 그레이엄 그린의 원작을 바탕으로 1949년 제작된 ‘제3의 사나이’라는 영화는 세계 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작이다.
영화의 대본도 원작자인 그린이 직접 썼다. 그러나 영화에서 해리 라임이라는 악한으로 나오는 할리우드의 전설적인 명배우 오손 웰스의 유명한 대사(臺詞) 한 구절은 웰스 자신의 창작이라고 한다.
▼스위스-홍콩 성장배경은 工業 ▼
악(惡)을 찬양하는 내용의 이 대사를 통해 웰스는 ‘이탈리아 역사는 전쟁과 살육으로 점철되어 있지만 인류에게 르네상스를 선사했고, 스위스는 500년간 화합하면서 민주주의와 평화를 추구했지만 인류사에 공헌한 것은 기껏 뻐꾸기시계뿐’이라고 비꼰다.
웰스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은 스위스를 제조업이라고는 뻐꾸기시계나 초콜릿 정도밖에 없고 관광업, 금융업 등 서비스업에 의존해 부자가 된 나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스위스는 사실 세계 최고의 공업국이다. 스위스의 1인당 제조업 부가가치액은 1998년을 기준으로 8314 달러로 세계 1위다. 이는 미국(5300달러)의 157%에 해당하며, 영국(4179달러)에 비해선 2배, 우리나라(2108달러)에 비해선 4배 가까운 액수다.
최근 우리 경제의 미래전략에 대한 논의가 왕성한 가운데, 우리나라도 선진국 대열에 합류하려면 빨리 제조업을 버리고 금융을 중심으로 한 서비스업으로 옮아가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금융 허브론자들에게 스위스는 달갑지 않은 예일 것이다.
어디 스위스뿐인가. 금융 허브론자들이 우리의 모범사례로 거론하는 싱가포르나 홍콩도 금융 강국이기 이전에 제조업 강국이다. 싱가포르의 1인당 제조업 부가가치액은 1998년을 기준으로 6178달러로 우리나라의 3배 가까이 된다. 홍콩도 지금은 중국과 통합돼 독자적인 제조업 기반이 축소됐지만,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1인당 제조업 부가가치가 우리나라의 2배(1985년 기준 홍콩 1322달러, 한국 668달러)에 이르는 공업국이었다.
이러한 사례가 보여주는 것은 금융이 부국에서 발전하는 것이지 금융의 발전을 통해 부국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역사적으로도 룩셈부르크, 모나코 등 세금도피처(tax haven) 역할을 하는 몇몇 작은 나라를 제외하고는 강력한 제조업 없이 금융 중심지로 성장해 잘 살게 된 나라는 없다.
17세기 암스테르담이 세계 금융의 중심지였던 것은 네덜란드가 당시의 ‘첨단산업’인 모직물산업에서 세계적 우위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18세기 말부터 런던이 암스테르담을 제치고 세계의 금융 중심지가 된 것은 영국이 산업혁명을 선도했기 때문이다.
20세기 들어 뉴욕이 세계 금융의 중심지가 된 것도 미국이 금융산업을 특별히 육성해서가 아니라 산업면에서 영국을 추월했기 때문이다. 스위스 싱가포르 홍콩이 금융 중심지가 된 것도 위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강력한 제조업 기반이 있기 때문이다.
금융 허브론자들은 또 말한다. 금융시장을 완전 개방, 자유화하고 영어 공용화 등을 통해 외국인 금융 인력이 살기 좋은 환경을 만들면 우리나라가 홍콩이나 싱가포르를 제치고 최소한 아시아의 금융 중심지는 될 수 있다고.
▼ 산업발전 없인 ‘금융중심’ 안돼 ▼
그러나 이는 홍콩 싱가포르가 아시아의 금융 중심이 된 이면에 제조업 기반 외에도 장기간의 영국 식민지 지배로 생긴 서구와의 인적 문화적 제도적 유대라는 역사적 요인이 있다는 점을 간과한 얘기다.
특히 홍콩(香港)의 경우는 도시 이름 자체가 200여년 전부터 정착해 사업을 하던 영국 자본가들에 대한 중국식 호칭인 홍(香·Hong)을 따서 붙여졌을 정도로 영국 자본의 뿌리가 깊은 곳이다. 아직도 홍콩의 많은 대기업들은 영국계다. 우리가 역사를 바꿀 수 있다면 모르되, 홍콩 싱가포르를 제치고 아시아 금융 중심이 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우리나라가 진정한 금융 중심지가 되려면, 역설적으로 제조업을 더 발전시켜 우선 제조업 중심지가 되고, 이를 통해 자연스럽게 금융 중심지가 되는 전략을 택해야 한다.
장하준 영국 케임브리지대 교수·고려대 BK21 교환교수·경제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