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일기자
박범진(朴範珍) 전 민주당 의원은 18일 오후 서울 여의도 모 호텔에서 두 시간여 동안 진행된 인터뷰 내내 시종 열띤 목소리로 ‘돈 정치’의 문제점을 고발했다. 그는 먼저 2000년 4·13총선 직전인 4월 초 5대 재벌그룹 중 한 곳인 A기업의 사장급 임원 B씨로부터 1억원을 전달받은 경위를 생생히 밝혔다.
그의 지구당 사무실을 찾아온 B씨는 “회장님께서 박 의원님께 각별한 관심이 있어 도와드리는 것”이라며 들고 온 보스턴백 1개를 불쑥 내밀었다.
박 전 의원은 직감적으로 중앙당에서 보낸 ‘밀사’라는 것을 알아챘다. 며칠 전 당의 고위관계자가 “기업에서 사람이 갈 것”이라고 귀띔해 주었기 때문이다. ‘밀사’가 남기고 간 가방에는 1만원권 현찰 1억원이 가득 들어 있었다. 며칠 뒤 역시 5대 재벌그룹 중 다른 C기업의 부사장 D씨가 같은 방식으로 현찰 1억원을 들고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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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전 의원은 이 무렵 두 차례에 걸쳐 중앙당 실무당직자를 통해 1억5000만원의 비공식 지원금을 전액 현금으로 이미 전달받았다. 기업을 통해 건네받은 2억원과 마찬가지로 비공식 지원금은 장부에 기장할 수 없었다. 장부에 써넣은 중앙당 지원금은 지구당 통장으로 온라인 송금된 2억2000만원뿐이었다. 그는 당시 총선에서 쏟아 부은 돈이 “기억나는 것만 9억여원대”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실탄수령 방식이 4년 전(15대 총선)과 판에 박은 듯했다”고 회고하면서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96년 4·11총선 당시 여당인 신한국당 소속이었던 그는 강삼재(姜三載) 당시 사무총장에게서 수표로 3억원을 4차례에 걸쳐 나눠 받았다. 수표는 이미 세탁한 것인 듯 1000만원권 단위였다. 그는 또 이 무렵 대우그룹 고위 관계자에게서 현찰 2억원을 전달받았다고 실토했다. 박 전 의원은 “당시 이 관계자가 ‘(중앙당으로부터) 명단을 받아서 박 의원에게 오게 됐다’고 말했다”며 “당시 명단에 적힌 지원대상 의원이 몇십 명이 넘는 것으로 들었다”고 회고했다.
이 대목에서 박 전 의원은 한숨을 토했다.
“결국 부실 운영으로 쓰러진 대우에서 거액을 지원받은 것입니다. 대우가 부실로 쓰러지는 데 한나라당(전 신한국당)도 책임이 있고 그곳에 몸담아 돈을 받은 나도 책임을 면키 어려워 지금도 양심의 가책을 느낍니다.”
박 전 의원은 ‘경선자금 양심고백’으로 최근 법원에서 벌금 500만원을 선고받은 민주당 김근태(金槿泰) 의원에 대해서도 “가장 깨끗하고 양심적인 사람을 법정에 세우는 것은 우리 정치의 희극”이라고 지적한 뒤 “돈에 관한 한 한나라당도 할 말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는 인터뷰에서 ‘독자적으로’ 조달한 돈에 관해서도 솔직하게 고백했다.
“주로 연고가 있는 동창 등을 통해 자금을 마련했습니다. 좀 큰 덩치는 2000만∼3000만원 정도 되지만 대부분 비공식적으로 받아서 회계처리는 엄두도 못 냈으며 선거 때 돈을 보내는 사람들도 노조의 반발 등을 우려해 기록을 남기지 않으려 하더군요.”
“수수 자금 중 장부에 기재하는 비율은 얼마나 되느냐”는 물음에 한동안 망설이던 그는 “30% 미만일 것”이라고 답했다.
그는 “중앙당이 음성적 자금을 조성하고 기업을 통해 자금을 지원하는 것이 대통령의 지시나 묵인 없이 어떻게 가능하겠느냐”며 “정치부패 척결은 정치부패의 몸통인 대통령의 의지와 결단이 있어야만 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는 “‘마니 폴리테(깨끗한 손)’를 표방한 이탈리아의 안토니오 디 피에트로 같은 검사가 나타나면 우리의 기존 정당은 모두 해체돼야 할 상황에 내몰릴 것이다. 들키지 않았으니 그만이라는 생각으론 정치인들의 ‘겉 다르고 속 다른’ 거짓말 행진은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역설했다.
그는 “돈 선거의 풍토를 15대 국회 말 양심선언하려 했으나 지인들이 말렸다”며 “더 이상 침묵하는 것은 비겁한 행동이란 생각에 고백을 하게 됐다”고 다 털어놓기로 결심한 배경을 설명했다.
박 전 의원은 끝으로 “대학 1학년 때 4·19혁명에 참여했던 정신을 소중히 여겨온 사람인데 정치에 몸담은 뒤 돈 문제 때문에 죄인이 된 것 같아 항상 부끄럽고 참담한 심정이었다”고 덧붙였다.
박성원기자 swpark@donga.com
▼박범진 前의원은…▼
14, 15대 국회의원을 지낸 해직기자 출신(63세).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한 뒤 67년 ‘민족주의 비교연구회’(민비련) 사건으로 6개월간 투옥되기도 했다. 75년에는 유신정권에 맞서 언론자유수호투쟁을 하다가 조선일보에서 해직됐다가 서울신문 논설위원 편집부국장을 거쳐 88년 민정당에 입당해 정계에 입문했다. 이후 민자당 대변인, 신한국당 총재비서실장 등을 지냈다. 97년에는 이회창(李會昌) 후보의 김영삼(金泳三) 대통령 탈당 요구에 반발해 탈당한 뒤 국민신당 사무총장을 지냈다.
98년 국민회의와 국민신당이 합당된 이후 국민회의 홍보위원장과 민주당 지방자치위원장 등을 지냈고 지난해 9월에 탈당, 국민통합21 창당기획위원장으로 후보단일화 활동에 앞장섰다. 그러나 올해 1월 국민통합21을 탈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