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이하학적인 취미 탓일까. 올여름 읽은 책 중에 요강에 관한 얘기가 실린 책들이 재미있었다.
하나는 한국 철학계의 원로 김태길 박사의 자서전 ‘체험과 진실’에서 본 요강 옹호론. “우리가 실내에서 요강이라는 변기를 사용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소변만을 위해서 사용하는 것이며… 소변은 부패하기 전에는 조금도 불결할 것이 없는 물건이다. 일본에서는 요강은 사용하지 않지만 변소가 안방이나 부엌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지 않느냐? 우리나라 속담에 변소와 사돈집은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좋다는 것이 있다.” 김 박사가 일제강점기의 교토 유학 시절 일본 학우 앞에서 했다는 얘기다.
▼이름과 실제 다를 수도 있어▼
다른 하나는 B 모이나한의 ‘영국의 세기’에 나온 빅토리아 여왕의 고사. 전 지구 인류의 4분의 1을 지배하던 ‘대영제국의 세기’에 60여년이나 군림했던 여왕이 과부가 된 것은 1861년. 그때부터 상복을 입은 여왕은 부군(앨버트 공)이 살아 있는 것처럼 밤이면 고인의 침실에 자리를 펴고 아침이면 쓰지도 않은 요강을 깨끗이 가시게 했다는 것이다.
나에게는 좀 색다른 요강 체험이 있다. 나는 20대의 한동안 경복궁 동십자각 근처의 천변, 그러니까 복개되기 이전의 청계천 상류의 2층집에서 산 일이 있다. 지금도 눈에 선한 추억으로는 새벽만 되면 집집마다 아낙네들이 ‘부패하기 전’의 내용물이 가득 찬 요강을 들고 나와 개천에 비우는 풍경이었다. ‘청계천’이 아래로 흘러갈수록 그 수질이 어찌 되었을지….
그렇대서 깨끗하지도 않던 청계천 복구에 반대하려는 것은 아니다. 나는 청계천 복구만이 아니라 서울의 고궁 고성 등의 복원에 적극적 평가를 하고 있다. 특히 몇 해 전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19세기 풍경화의 거장 장 바티스트 카미유 코로 대전을 본 후 더욱 그렇다. 오늘 날 세계의 관광 명소가 된 파리의 몽마르트르는 코로 당대엔 서울의 어느 달동네보다도 더 지저분한 몰골이었다. 오페라 ‘토스카’의 배경으로도 유명한 로마의 산탄젤로 성은 19세기 중엽까지만 해도 제방도 없던 테베레 강변의 을씨년스러운 폐허에 불과했다. 20세기 초부터 유럽의 도시들은 해마다 아름다워졌다고 한 슈테판 츠바이크의 말을 그때 나는 실감했다. 다만 청계천과 관련해 한마디 해 두고 싶은 것은 이름과 실물이 후대가 생각하는 것처럼 일치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최근 인공기를 불살랐다고 해서 대구 하계 유니버시아드에 불참한다고 북이 억지를 부리니 대통령이 유감 표명을 해서 남남(南南) 갈등의 새 불씨가 되고 있는 모양이다. 6·25전쟁을 체험한 세대에겐 참 보기도 듣기도 민망한 남남 갈등이다. 우리 세대도 세상 물정 몰랐던 젊은 시절에는 말을, 이름을 그대로 믿었고 또 믿으려 했다. 그래서 건국 초기에 엉망진창이던 남이 아니라 북이야말로 참된 ‘민주주의’와 ‘인민’의 ‘공화국’인 줄로 믿은 많은 사람들이, 특히 지식인들이 사선을 뚫고 월북까지 했다.
그러나 전쟁은 모든 것을 이름 아닌 실물로 폭로해 주었다. 더욱이 3년 전쟁의 포연이 가라앉자 더욱 처절한 ‘진리의 순간’이 엄습해 왔다. 정전협정을 체결하고 불과 1주일 후에 북에선 남로당 간부 이승엽 이강국 등과 월북 문인 임화 설정식 등을 미제의 간첩으로 몰아 처형해 버린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꼭 50년 전의 일이다. 청류인지 탁류인지는 몰라도 남한 내부의 좌파 흐름에는 그때부터 덮개가 씌워졌다. 국군을 시켜 국토에서 국민을 학살한 80년의 광주 대참극 때까지….
▼통일-인민… ‘좋은 말’ 過信 말아야▼
오늘의 남남 갈등이란 복개됐던 이념 대립을 다시 들춰내는 복원작업이라고나 할 것인가. 그 싸움에 끼어들 생각 없는 노인이 그래도 한마디 당부하고 싶은 말은 있다. ‘민족’도 ‘동족 화합’도 ‘청계’천도 이름과 실물이 꼭 같지는 않다는 점이다. 6·25전쟁은 ‘통일’ ‘인민’ 등의 아름다운 이름으로 어떤 외세보다도 더 많은 ‘동족’이 ‘동족’을 살해했다. 그것을 얘기가 아닌 현실로 체험한 세대가 해 줘야 할 말은 좋은 ‘말’을 너무 믿지는 말라는 것이다. “말에 대한 불신은 말에 대한 과신보다 결정적으로 해가 적을 것”이다. 바츨라프 하벨은 그래서 “말에 대한 회의와 고발이야말로 지식인의 고유한 임무”라고 적고 있다.
최정호 울산대 석좌교수·언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