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KBS 2TV ‘황정민의 인터뷰’ 취재차 음악 인생 35주년 기념 콘서트를 준비 중이던 조용필씨를 만났다. 특별히 까다롭거나 어려운 인터뷰는 아니었다. 날카로운 눈으로 여기저기 찔러봐야 하는 것도 아니고, 행여 설화(舌禍)를 입을까 조심할 일도 없었다. ‘조용필’이라면 오랫동안 대중음악계의 지존으로 군림해 온 인물이 아니던가. 게다가 2년 전쯤에도 그를 취재한 적이 있었다. 사실 상대가 나를 알고 있으면 인터뷰는 훨씬 쉬워진다. 편안함에 이야기의 실마리를 풀기 쉽고, 때로는 속 깊은 얘기도 나눌 수 있다. 더구나 지난번 만남에서 좋은 인상을 받았기에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특별한 준비 없이도 잘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조용필 인터뷰 민망한 실수 연발▼
그런데 웬일인지 인터뷰는 리허설부터 꼬였다. 정말 궁금한 건 그의 근황이었다. 소중한 사람을 떠나보내고 이런 큰 잔치를 여는 마음이 어떤지 묻고 싶었다. 그런데 막상 입을 열자 요즘 후배 가수들이 외국 진출하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외국에 진출할 생각은 없는지 따위의 질문이 쏟아져 나왔다. 그는 조금 당황한 표정으로 “아니, 내가 해외진출 1호인데…”라면서 말끝을 흐렸다. ‘아차’ 싶어 화제를 돌린다는 게 새 앨범을 계획하고 있느냐는 질문을 던지고 말았다. 분명 이달 말에 그의 새 앨범이 나온다는 기사를 읽었는데도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묻고 만 것이다.
그의 얼굴에 불쾌한 기색이 지나갔다. 이렇게 준비 없이 찾아와서 무슨 인터뷰를 하겠느냐고 질책하는 것만 같았다. 바꿔놓고 생각해 보면 나라도 화를 냈을 것이다. 아이템이 갑자기 잡혀 여유가 없었다는 따위의 변명은 발붙일 곳이 없었다. 미안했고, 미안한 만큼 난감했다. 그 때문에 질문을 할 때마다 ‘혹시 이것도 내가 잘못 아는 것 아닐까’ 싶어 조심스러웠고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기도 민망했다. 나의 화장이 발갛게 달아오른 내 얼굴을 감춰주기를 바랄 뿐이었다. 간신히 인터뷰를 마친 뒤 스스로에게 화가 나 견딜 수 없었다. 터무니없는 실수들을 용서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프로그램 제목에 이름 석 자가 붙어 있다는 게 내게는 ‘명예’이자 ‘멍에’다. 초년병 시절이라면 자신은 물론 주변 사람들도 웬만한 실수는 여유 있게 넘겨준다. 그러나 제법 많은 후배들이 생긴 지금은 그런 여유를 기대할 수 없다. 아나운서의 인터뷰라는 새로운 형식의 프로그램이라도 주변의 기대치는 한없이 높다. 방송생활 10년을 넘겼건만, 현장의 만남을 부드럽게 만들어 가면서 분위기를 주도한다는 게 여전히 힘들다. 언제나 촬영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는 아쉬움이 남았고 그날그날 방영분마다 새록새록 단점들이 드러났다. 어색한 입 모양, 어정쩡한 질문 등….
KBS라디오 ‘FM 대행진’을 처음 맡았을 때의 악몽이 다시 살아오는 것 같았다. 나에게 맞지도 않는 옷을 입고 사람들 앞에서 어릿광대 노릇을 하고 있다는 느낌, 빨리 무대에서 내려오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그때는 전임자가 너무 잘해 거기에 익숙해진 청취자를 파고들 틈이 없어서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돌아보면 꼭 그런 건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에 대한 여유와 믿음이 부족한 게 더 큰 원인이었다.
▼방송 10년…아직도 갈길 멀기만▼
조용필씨는 내게 35년간 방송을 진행할 자신이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크게 손사래를 치며 자신 없다고 했다. 시도 때도 없이 잡히는 인터뷰 일정을 따라잡을 체력도 모자라고, 밤을 새우며 철저히 준비하려는 정신력도 부족하다. 더구나 제 몫을 깔끔하게 해내는 후배들이 즐비한데 언제까지 ‘통통 튀는’ 모습으로 버틸지도 의문이다. 하지만 생각해 보니 조금 바꿔 말해야겠다. 잘할 자신은 없지만 잘할 때까지 할 자신은 있다. 너무 뻔뻔스러운가? 내게는 아직도 시간이 필요하다.
:약력: △1971년생 △이화여대 영문과 졸업(1993) △KBS 2TV ‘황정민의 인터뷰’ ‘도전! 지구탐험대’, 라디오 ‘황정민의 FM 대행진’ 진행 중 △저서 ‘젊은 날을 부탁해’(2002)
황정민 KBS아나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