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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피플]이명세 감독 "한국영화 성공했다고? 허허 …"

입력 | 2003-08-22 17:59:00


1970년대 인기 그룹 ‘비지스’의 감상적이면서도 달콤한 노래 ‘홀리데이’, 길게 이어지는 계단, 춤추듯 떨어지는 노란 은행잎들, 그 사이로 번져가는 핏물….

영화 ‘인정사정 볼 것 없다’(1999)의 계단 살인 장면. 이명세 감독(46)의 독특한 스타일을 한눈에 보여주는 명장면이다.

89년 데뷔작 ‘개그맨’을 시작으로 ‘인정사정…’까지. 그는 한국 영화계의 대표적 스타일리스트이자 독자적 ‘브랜드’로 인정받아왔다. 2000년 할리우드 진출 선언 이후 3년. 그는 한국영화를 ‘버려두고’ 미국에서 뭘 ‘얻었을까’. ‘인정사정…’을 패러디한 CF 촬영을 위해 일시 귀국한 그를 최근 서울 강남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CF를 찍을 줄 몰랐는데….

“장편영화가 소설이라면 CF는 한편의 시다. 공력은 같다. 나의 21세기 첫 영화는 1분짜리 단편영화(CF)로 시작된 셈이다. 시청자 반응이 몹시 궁금하다.”

―CF는 ‘인정사정 볼 것 없다’ 중 박중훈 안성기의 마지막 대결을 패러디한 것으로 알고 있다.

“전지현과 신인 남자배우를 함께 썼다. 강원도 태백의 영화 촬영 장소가 그대로 남아 있어 거기서 찍었다. 여기까지다. 1분짜리 영화에서 더 알려고 하면 안 된다. TV를 열심히 봐라. (웃음)”

이 청바지 CF는 9월경 TV를 통해 방영된다. 눌러쓴 캡에 덥수룩한 수염, 한담을 나누듯 느릿한 말투. 3년 만에 만나도 영화감독 같지 않은 그의 소탈함은 여전했다.

―2000년 미국으로 떠날 때 전성기였는데 공백이 긴 것 아닌가.

“그렇지 않다. 약간 늦춰졌을 뿐 할리우드 관계자들과 함께 두 개의 프로젝트를 진행해오고 있다. 하나는 ‘디비전(Division)’으로 액션 영화인데 버디무비 스타일이다. 10월에 본격 작업에 들어간다. 또 하나는 ‘더 크로싱(The Crossing)’이란 제목의 모험 어드벤처다.”

―왜 늦어졌나.

“결국 그 시간은 한국 영화감독이 할리우드 시스템에 적응하는 시간이었다. 한국에서는 감독이 큰소리치고 닦달하면 작가가 밤을 새워서라도 시나리오를 쓰지 않나. 미국 사정은 그렇지 않았다.”

―최근 한국영화의 시장 점유율이 40%를 넘어서는 등 성장했다고들 한다. 밖에서 본 한국영화는 어떤가.

“허허. 어떤 면에서 나는 ‘유령’이다. 감독은 작품으로 승부해야 하는 데 미국과 한국을 떠돌기만 했으니까. 한국영화가 성공했다고? 내 생각은 다르다. 문제는 창조성이다. 대부분 흥행공식에 맞춘, 틀에 박힌 작품들만 쏟아져 나오고 있다. 쥐포가 잘 팔린다고 모두 쥐포만 팔면 쥐포장수들 어느 순간 다 망한다. 한때 아시아 영화를 지배했던 홍콩영화가 그렇게 망했다.”

―구체적으로 지적하자면….

“겉으로 볼 때 반짝반짝 하는 것 같지만 한 꺼풀만 들추면 그게 그거다. 영화 제작자들이 돈 대는 투자자 눈치만 살피느라 비슷비슷한 공식만 쓰다간 결국 다 망할 것이다.”

‘유령’을 자처한 그의 격정은 영화계는 물론 한국 사회의 ‘이상한 나이 문화’에 대한 아쉬움으로까지 이어졌다.

―벌써 40대 중반인데….

“‘열린사회’라는 게 뭔가. 고정관념이 사라지는 것 아닌가. 나이 들고, 늙었다는 게 악(惡)이고, 젊으면 선(善)인가. 우리 사회에 이상한 풍토가 생겼다. 상업적이라고 욕하는 할리우드도 그렇지는 않다. 블록버스터(흥행대작)가 있지만 예술적인 우디 앨런의 작품을 보는 팬들도 있다. 나이든 배우와 감독들이 힘을 갖고 존경 받는다. 이를 테면 우리는 왜 ‘결혼이야기’ 같은 작품을 원로인 유현목 감독에게 의뢰하지 않는가. 틀을 깨는 발상이 중요하다. 그래서 난 이 시대가 깊이가 없다고 생각한다.”

―한국 영화는 안할 건가.

“아마 내년쯤 될 것 같다. 아직 밝힐 단계는 아니다.”

―안성기 박중훈이 단골 멤버였다. 차기작에서도….

“아직 모른다. 하지만 난 감독이 짊어진 중요한 숙제 중 하나가 배우를 업그레이드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안)성기 형이나 중훈이와도 그런 식으로 작업했다. 내꿈 중 하나가 성기 형과 함께 장수만세에 나가는 것이다.”

인터뷰 중 밖에는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정말 ‘홀리데이’가 그리운 날이었다. ‘Ooh you’re a holiday∼’.

김갑식기자 gs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