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귀신은 불쌍하다. 애처롭고 가련하다. 그들은 못다 푼 한에 얽매여 이승을 떠났어도 저승에 이르지 못한 채 그 경계에서 자꾸만 뒤를 돌아본다. 그리고 우리에게 돌아온다. 옷장이며 침대, 거울, 식탁 같은 우리의 익숙한 일상으로 찾아온다. 그들의 한 맺힌 이야기는 어떻게 풀어내느냐에 따라 애처롭기도 하고 그저 시끄러운 소음이 되기도 한다. 틀에 박힌 귀신은 소리만 지르게 만든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번 여름에 본 공포 영화들은 어떠했는가.
▼ 비명으로 가득찼던 여름 극장가 ▼
사람을 놀라게 하기는 쉽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 중저음의 둔탁한 음향, 화면을 가득 채우는 피투성이 얼굴…. 그러면 정말 ‘깜짝’ 놀란다. 그러나 그것이 진정한 공포는 아니다. 피부에 소름이 돋고 뒤통수가 ‘쭈뼛’하여 끝내 마음 깊은 곳까지 서늘한 냉기가 스며드는 공포의 세계는 비명의 아수라장과는 거리가 멀다. 우리는 그것을 히치콕의 영화 ‘사이코’에서 배웠다. 그 영화는 공포가 결국 인간과 세계의 부조화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말해준다.
올 여름 극장가에는 ‘장화,홍련’을 시작으로 ‘여고괴담3’, ‘4인용 식탁’, ‘거울 속으로’ 등이 선보였다. 계절 특성에 맞게 연거푸 쏟아져 나온 이 영화들은 영상 문법의 세례를 집중적으로 받으며 성장한 젊은 감독들의 야심작인 동시에, 각 제작사가 여름의 황금시장을 겨냥한 상업적 기획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우리 영화의 현재 수준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증거물이 되었다. 액션이나 멜로와 달리 공포 영화는 상업 구조 속에서 감독의 작가적 욕망을 적극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 장르적 특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젊은 감독들이 어떠한 상상력의 세계를 펼쳐내는가를 기대하기에도 충분했다.
악령 들린 영혼, 혹은 위로받지 못한 귀신이라는 측면에서 이 영화 속의 주인공들은 잠시 시간이라도 나면 끝없이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싶을 정도였다. 상처받지 않은 영혼이 어디 있으랴. 그런데 그 시간을 내기가 참 어렵다는 게 문제다. 대체로 틀에 박힌 이야기였고 소음이 먼저 압도했다. 부분적으로는 지루하기까지 했다. 감독들은 공포라는 여과기를 통해 인간적 상실의 극단적인 비애, 정상과 비정상의 기이한 두려움, 끝없이 반복되는 유전자의 형벌 등을 드러내고자 하였으나 주제의 선명성에 비해 이야기의 흐름이 허전했다. 부분이 소홀하여 전체가 두렵지 않았다. 틀에 박힌 캐릭터의 앙상함을 편집의 기교와 기괴한 소음으로 채웠다.
요컨대 우리가 공포 영화를 보면서 기대하는 진정한 측면, 말하자면 비명이나 지르며 놀라기 위해서가 아니라 잔잔히 스며드는 인간적 상실, 곧 저주와 비애가 이중나선으로 겹쳐지는 서늘한 공포의 리얼리티를 올해 공포 영화들은 대체적으로 채워주지 못했다. 이것은 흥행 기록과는 별개의 문제다. 장마와 폭염 속에서 관객들은 할리우드의 시답잖은 속편 시리즈들 대신 김지운 감독과 전지현과 유지태를 선택했을 뿐이다.
▼ 젊은 감독 ‘서늘함의 미학’ 아쉬워 ▼
상상력의 빈곤 때문이라고 하면 심한 견책이 될까. 잠시 생각해 본다. 틀림없이 젊은 감독들의 기량은 충분하고 이들에게는 영상 문법에 대한 놀라운 이해가 있다. 혹시 그것이 문제인 것은 아닐까. ‘영화적인, 너무나 영화적인’ 이 행복한 영상 세대의 기대주들은 영화가 테크닉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성찰의 기록이라는 점, 예술이 단순한 르포르타주의 차원을 넘어 상상력의 힘으로 ‘생의 이면’을 탐사하는 것임을 잊은 것은 아닐까.
유전자의 형벌에 신음하는 ‘악종 인간’에 대하여, 동일성의 경계선 바깥으로 추방당한 저주받은 영혼들에 대하여 우리의 젊은 감독들은 지나치게 장르의 문법으로 접근했다. 관객들이 비명을 지르게 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생의 이면을 관객과 함께 탐사하는 일, 그 잔혹스러운 임상실험 끝에 얻은 생생한 증거물, 곧 등줄기에 흐르는 서늘한 식은땀을 만들어주지는 못했다. 진정한 공포의 문 앞에서 서성거리다 만 여름이었다.
정윤수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