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 안 들어주면 당신들 건설교통부 올해 예산은 국회 통과를 기대하지 않는 게 좋을 거요."
2000년 7월 어느날 국회 의원회관 송광호(宋光浩) 의원 사무실에서는 송 의원이 건교부의 한 주무간부를 불러놓고 노골적인 '압력'을 넣고 있었다. 지역구(제천-단양)내에 건설을 추진중인 송강-백운간 도로 확포장 공사가 예산 배정 미비로 자꾸 공기(工期)가 늦어지는 데 대해 건교부측에 '본때'를 보이자고 작심한 것. 그해 4월 총선을 통해 어렵사리 원내에 복귀한 송 의원으로서는 건설교통위원에다가 예결위원 자리까지 따 낸 자신의 '힘'을 지역구민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놓칠 수 없는 기회였기 때문이다.
건교부 관계자는 "사업 우선순위에서도 밀리고 아직 공기도 좀 남아 있으니 좀 기다려 달라"고 사정조로 말했으나 송 의원은 막무가내였다. 실무자에서 과장급 국장급 간부들을 수시로 국회로 부르고 식사 대접도 하면서 전방위 압박을 가한 끝에 당초 건교부가 책정했던 100억원 규모의 해당 예산을 300억원으로 대폭 증액시킨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대신 나도 건교부가 국회에서 꼭 통과시키려 하는 '역점사업' 예산, 특히 김대중 정부의 의지가 강했던 호남전철 복선화사업에 대해 손을 들어줬어요. 정기국회 때 초반에는 일부러 부정적 발언으로 건교부를 아연 긴장케 했지만 목적을 달성했으니 나도 인심 하나 쓰는 거죠. 자기네 아킬레스 건을 물고 들어가면서 물밑으로 '우리 지역 공사 예산 들어줄 거냐'고 흥정을 해들어가면 정부 부처로서도 안 들어주곤 못 배기죠."
송 의원은 27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가진 3시간 동안의 인터뷰를 통해 지역구의 인심을 얻기 위해 국가 예산구조를 왜곡하고 예산안을 누더기로 만들었던 자신의 행적에 대해 솔직히 토로했다. 국민대표기관으로서 국가의 자원을 합리적으로 배분하는 국회의원 본연의 역할보다는 '표'에 눈이 어두워 국가예산을 '잿밥'처럼 지역구에 끌어대는 데만 혈안이 돼있었다는 참회였다.
"역시 2000년 정기국회 때였어요. 원주-강릉간 철도 신설 예산이 100억원 편성돼 건교위의 예산심의에 올라왔는데 이 사업은 국민편익을 위해서도 꼭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나 눈 딱감고 반대했어요. 이것을 들어주면 한정돼 있는 철도사업 예산중 제천-단양 지역에 할애될 예산은 없을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건교위에 원주 강릉 지역 국회의원이 없던 상황에서 송 의원은 "기존 철도도 복선화가 안된 곳이 많은데 돈이 수천억원 들어가는 신규사업을 한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 저지선을 폈고, 결국 문제의 예산은 3년째 반영되지 못한 상태다. 송 의원은 "원주 강릉 주민들에게는 특히 죄송한 마음이다"며 "올해는 그 사업예산에 반대하지 않기로 했다. 그쪽 지역구 의원들한테 나도 언젠가 도움을 받을 일도 있을 것 아니냐"고 덧붙였다.
14대 국회 때인 95년 가을 정기국회에서는 지역구내에 옥순대교 건설 예산을 따내기 위해 김중위 당시 예결위 계수조정소위 위원장에게 '로비'를 했다. 본래 계수소위 위원이 아닌 사람은 회의장에 들어갈 수 없지만 김 위원장에게 "선배님, 저 좀 한번 봐주십시오"라고 사정한 끝에 회의장에 들어가 사업명과 예산요구액이 적힌 '쪽지'를 돌릴 수 있었던 것. 이렇게 마련된 226억원의 예산으로 옥순대교가 건설된 것이 2001년이다. 그러나 아직도 하루 통과 차량이 10대를 넘지 않는 '무인지교(無人之橋)'를 건널 때면 송 의원은 "경제성이나 투자효과를 고려치 않은 채 나의 표밭갈이용으로 나라 예산을 낭비한 것 아니냐"는 죄책감에 사로잡힌다고 털어놨다.
내 지역구 일이 아닌 사업이지만 부득이하게 들어줄 수 밖에 없는 예산 부탁도 적지 않았다는 게 송 의원의 고백이다.
"지난해 정기국회 때 충주 괴산 지역에 달천댐을 건설하겠다는 건교부의 예산안이 예결위까지 올라왔는데, 나도 건교위 의원으로서 수자원 정책상 물부족 문제 해결을 위해 댐 건설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실제 댐이 건설될 경우 수몰지역민 이주로 인해 괴산군이 없어질 경우 있다는 점에서 충북의 도세가 약화될 것을 우려했습니다. 특히 댐 건설에 반대하는 괴산지역 도의원 군의원 지역유지 등이 줄줄이 의원회관에 찾아와 '이것만 막아주시면 제천에 있는 친지들을 모두 동원해 다음 선거에서 도와드리겠다'는 말에 주저없이 관련 예산을 전액 삭감시키기로 했습니다."
2001년에는 충주시가 '신탄금대교' 건설과 관련, 미적 감각을 살릴 수 있도록 설계변경을 하겠다며 송 의원에게 도움을 요청해온 일이 있다. 그러나 설계변경에는 500억원의 추가예산이 소요되는 만큼 자칫 감사원의 감사 지적을 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건교부는 난색을 표시했다. 송 의원은 이에 감사원 고위관계자를 만나 '감사에서 문제삼지 않겠다'는 감사원측의 입장을 서면으로 건교부에 보내주도록 '떼를 쓴' 끝에 뜻을 이룰 수 있었다.
"감사원도 예산 심의 때 고생하지 않으려면 예결위 소속 의원의 부탁을 무시하긴 어려웠을 것입니다. 왜 국회의원들이 서로 예결위에 들어가려 하느냐면, 상임위는 해당 부처 장관만 출석하지만 예결위에는 모든 부처 장관들이 다 오거든요. 지역구 관리상 내가 필요한 예산이 좀 있을 경우 먼저 정부쪽에서 청구한 예산 자료를 다 뒤져서 불필요하다 싶은 항목을 하나 꼬투리로 잡습니다. '이것 좀 통과 어려울 것'이라고 압박하면 해당부처 장차관 등이 놀라서 내 주문을 다 들어줘요. 부처의 공무원들도 예산심의 때는 국회에 모두 나와 있는데 사전 질의자료에서 자기네 것을 시비하는 내용이 들어가 있으면 화들짝 놀라 달려옵니다. 이것 왜 넣으셨느냐, 뭐 필요한 것 없느냐, 이런 식입니다."
송 의원은 지난해에는 계수조정 소위 위원까지 맡았다. 계수소위를 맡자자마 송 의원의 국회 의원회관 사무실에는 사돈의 팔촌이라도 안면이 있는 사람은 모두 찾아와 "예산확보를 도와달라"며 서류를 내미는 통에 사무실은 순식간에 서류더미로 가득차더라는 것.
"군시절 동료였던 모 업체 부장이 자기네 회사가 발주한 군수산업 관련 예산 확보를 부탁하러 제대후 처음으로 찾아오는가 하면 영향력 있는 한 중진의원은 예결위 복도로 찾아와 모부처 예산담당으로 있는 아들의 부탁이라며 어떤 시설 건립 예산을 부탁합디다. 솔직히 그 사업 내용도 잘 모른 채 '쪽지'를 갖고 회의장에 들어가서 무조건 넣자고 우겨서 반영했어요. 내가 언젠가 그 분에게 신세를 질 지도 모르는 일이라는 생각부터 앞선 거죠."
그는 또 당내(지난해 당시 자민련) 의원들이 워낙 이것 저것 부탁하는 것이 많아서 아예 "필수 관철요망 사업 한가지씩만 얘기하라"며 이를 받아서 깨알같이 작게 적은 메모지를 양복 상의에 넣고 회의장에 들어가기도 했다고 털어놨다.
"부처 예산 관계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네 사업 예산 확보를 위해 제천고 후배나 제천출신, ROTC 후배라든지 별의 별 인연을 다 찾아서 사람을 보내요. 하다못해 제천 사람이 없으면 충주출신이라도, '친척이 제천 산다'며 찾아옵니다. 와서 명함을 준뒤 '제천에 누구 아느냐'고 해서 안다고 하면 슬그머니 꺼내는 것이 예산 관련 쪽지예요."
결국 예산 심의에서 전체 예산안의 합리성이나 타당성을 조목조목 심의하는 일은 엄두도 못 내고 지역구의 표와 개인적 이해관계를 따라 이리 뜯어붙이고 저리 찢어붙이면서 국가예산안을 '유린'했다는 게 그의 처절한 반성이었다.
박성원기자 swpar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