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환위기 이후 정부가 부실 금융기관과 기업을 매각하면서 경제논리보다는 정치논리에의존, 공적자금 투입이 불어났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98년 12월 제일은행 매각을 발표하는 이헌재 당시 금융감독위원회 위원장(가운데). -동아일보 자료사진
“채권 서류를 확인하려고 시간을 더 끌다 제2의 외환위기가 닥치면 캠코(KAMCO·자산관리공사)가 책임질 겁니까?”
“채권이 실제로 존재하는지 아닌지 기본 서류도 확인해 보지 않고 어떻게 무조건 돈을 내줄 수 있습니까?”
2000년 4월 초 서울 여의도 금융감독위원회 11층 이용근(李容根) 부위원장 집무실에서는 밖에서도 들릴 정도로 한동안 고성이 오갔다. 말씨름의 주인공은 정재룡(鄭在龍) 캠코 사장과 오호근(吳浩根) 대우계열 구조조정추진협의회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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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위원장은 69개국 480개에 이르는 대우그룹 해외채권단과 길고 긴 협상 끝에 한국이 총대출금의 약 40%를 떠안기로 한 만큼 캠코가 하루라도 빨리 돈을 내주라는 주장이었다. 반면 정 사장은 아무리 급해도 근거 서류는 챙겨 봐야겠다고 버틴 것이다.
이 당시 재정경제부와 금감원 안팎에서는 ‘캠코가 감사원 감사와 국회가 두려워 사소한 규정을 꼬투리 잡아 협상을 그르치려 한다’는 비판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왔다. 사정이 이렇게 돌아가자 해외채권단들이 “한국은 이제 다시 돈 빌릴 생각을 하지 말라”고 협박을 가했고 깜짝 놀란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은 얼마 전 이기호(李起浩) 경제수석비서관을 불러 조정을 지시한 터였다.
하지만 그 뒤 캠코가 채권 서류를 확인한 결과 9억5000만달러는 변제를 하지 않아도 되는 것으로 밝혀졌다. 당연히 이 액수만큼의 공적자금을 절약할 수 있었다. 이는 청와대의 입김과 정치논리를 물리친 결과였다.
그러나 이와 대조적으로 외환위기 이후 진행된 부실기업 매각은 실패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협상 실무자의 전문성 부족, 청와대와 정부의 잦은 개입에 따른 협상력 저하가 어우러져 부실기업 매각 협상은 종종 수렁에 빠졌다.
제일은행 매각과정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 예다.
이른 가을비가 촉촉이 내리던 1998년 9월 2일 오전 10시경. 청와대에선 주요 경제부처 장관들이 참석한 가운데 DJ주재로 경제정책조정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안건은 시중은행의 해외 매각. 묵묵히 보고 내용을 듣고 있던 DJ가 입을 열었다.
“서울은행 제일은행 가운데 한 곳은 빠른 시일 내에 매각하세요.”
순간 참석자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1998년 12월 말까지 부실 시중은행을 매각하겠다고 국제통화기금(IMF)에 약속한 DJ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DJ의 ‘연내 매각’ 독려는 이후 거역할 수 없는 ‘지상과제’가 됐다.
제일은행 매각협상의 실무 책임자였던 금감위 관계자의 회고. “인수합병(M&A) 협상은 원래 밀고 당기는 신경전이 아주 중요하다. 그런데 대통령이 나서서 매각시한을 정해놓고 그때까지 팔라고 윽박지르는데 어찌 협상력이 생기겠습니까.”
4개월 뒤인 1998년 12월 31일 오전 10시. DJ는 어쨌든 약속을 지켰다.
이헌재(李憲宰) 금감위원장은 제일은행을 미국계 투자펀드인 뉴브리지캐피털에 팔기로 양해각서(MOU)를 맺었다고 발표했다.
미국의 뉴욕 타임스는 “제일은행 매각은 외환위기 이후 DJ정부가 외국인투자자로부터 받은 가장 분명한 신임투표”라며 DJ를 치켜세웠다.
그러나 급하게 먹는 밥은 체하기 쉬운 법. 서둘러 맺은 MOU에는 수조원의 공적자금을 삼켜버린 독소조항이 숨어 있었다.
협상에 참여했던 한 실무자의 고백. “대통령의 말 한마디 때문에 시간에 쫓겨 제안서를 제대로 검토하지 못했습니다. MOU에는 제일은행의 자산가치를 시장가치로 평가한다는 조항이 있었는데 그것이 얼마나 무서운 의미를 담고 있는지 파악한 사람이 정부엔 단 한 명도 없었던 거죠. 경제상황이 호전되고 있는 시점이어서 사실 그렇게 서두를 필요가 없었는데도 은행 매각을 서두른 것은 국제사회에서 DJ의 체면을 살려주기 위한 측면이 강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하튼 1999년 초부터 시작된 본계약 협상은 갈수록 첩첩산중이었다.
재경부는 ‘뉴브리지가 내세우는 조건이라면 차라리 협상을 깨자’고 주장할 정도였다.
당시 재경부 금융정책국장이었던 정건용(鄭健溶) 전 산업은행 총재는 “IMF와 제일 서울은행을 해외에 팔기로 약속했지만 그것은 법적 효력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조건이 맞지 않으면 안 팔아도 됐다. 그런데 웃기는 일이 생겼다. 재경부의 반대가 심하자 청와대는 제일은행 매각 업무를 재경부에서 빼앗아 금감위로 넘겼다”고 증언했다.
DJ의 ‘오기(傲氣)’와 그에 대한 충성경쟁을 벌이던 핵심 측근들의 과잉 의욕이 빚은 결과였다는 설명이다.
이에 대해 강봉균(康奉均·현 민주당 의원) 당시 대통령경제수석은 이와는 다른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그는 “이규성(李揆成) 재경부 장관은 ‘제값을 받고 팔아야 한다’고 했고 이헌재 금감위원장은 ‘미룬다고 제값 받는 것은 아니다’라는 의견을 냈다. 결국 내가 중재해 협상을 마무리지었다”고 주장했다.
드디어 1999년 12월 23일, 공적자금 6조8000억원이 들어간 제일은행 지분 51%를 단돈 5000억원에 판다는 본계약이 체결됐다. 게다가 계약서에 ‘풋백옵션(put back option·인수 뒤 일정 기간 내에 발생하는 손실을 현금 등으로 보전하는 약속)’ 조항 삽입에 선뜻 동의하는 바람에 결국 11조원가량을 더 투입하는 등 제일은행에 들어간 돈은 무려 18조원에 육박했다.
한화그룹으로 넘어간 대한생명 매각도 경제논리보다는 DJ정부의 정치논리가 더 많이 작용했다.
‘국민의 정부’ 임기가 5개월밖에 남지 않았던 2002년 9월 23일.
공적자금관리위원회는 대한생명을 한화-오릭스 컨소시엄에 파는 안건을 표결에 부쳐 5 대 3으로 통과시켰다. 대한생명 지분 51%를 8236억원에 팔되 대금은 두 차례로 나누어 내도록 한다는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한나라당 정형근(鄭亨根) 의원은 이에 대해 2002년 9월 25일 국회 정무위의 금감위 국정감사에서 “박지원(朴智元) 대통령비서실장이 그해 9월 4일 윤진식(尹鎭植·현 산업자원부 장관) 재경부 차관에게 전화를 걸어 ‘대생 매각은 대통령 관심사항인 만큼 내일(9월 5일) 열리는 회의에서 한화에 매각하도록 결정하고 결과를 보고하라’고 지시했다”며 ‘외압설’을 주장했다.
당사자 중 한 사람인 윤 장관은 “그런 전화를 받은 적이 없다”며 “부총리도 있는데 박 실장이 왜 나한테 했겠느냐”고 부인했다.
하지만 대생 매각 작업에 참여했던 금감위의 고위 관계자는 “재경부와 금감위 실무자들은 대생을 한화 컨소시엄에 파는 것을 적극 반대했다”며 “공자위에 참석한 윤진식 차관과 박봉흠 기획예산처 차관, 그리고 유지창 금감위 부위원장이 실무자 의견과 달리 찬성표를 던진 것은 박 실장의 전화 때문일 것”이라고 말했다.
대생 매각 초기에 깊숙이 개입했던 이종구(李鍾九·당시 금감위 상임위원) 금융감독원 감사는 “한화그룹이 대생을 인수할 자격이 없었고 대생도 연간 이익이 8000억원이나 날 정도로 경영이 정상화되고 있었는데 헐값에 서둘러 매각한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특히 한화의 대생 인수는 보험회사를 새로 설립하는 것으로 간주해 부채비율 200% 미만이란 조건이 적용됐어야 했는데도 부채비율 232%인 한화에 대생이 매각된 데는 무엇인가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했다는 설명이다.
이에 대해 한화그룹측은 “정형근 의원이 근거로 제시한 국가정보원의 ‘도청’ 문건은 검찰에서 수사 중인 사안으로, 아직 실체가 확인되지 않은 것이다”고 해명했다. 한화측은 또 “금감위는 이종구 당시 상임위원이 개인의견으로 제시한 ‘부채비율 200% 이하’ 조건을 수용하지 않았던 만큼 절차상 문제는 없었다”고 말했다.
과정은 다르지만 대우자동차 매각도 DJ정부 관료들의 아마추어리즘의 극치를 보여줬다.
1999년 포드자동차는 70억달러에 대우차를 사겠다고 나섰다.
오호근 위원장의 증언. “포드의 70억달러 인수 의향을 이헌재 금감위원장에게 전달했다. 이 위원장도 처음에는 긍정적이었다. 하지만 최종 순간에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역시 공무원이라서 특혜시비에 휘말릴 것을 우려한 것 같았다.”
수의계약이 무산되자 국제입찰에 부쳐졌다. 이번에는 이용근 금감위원장이 뒤늦게 “포드가 70억달러에 인수할 것”이라고 밝히면서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 비밀준수 약속을 어기고 공개함으로써 포드 이사회가 대우차 인수안을 부결시키는 빌미를 주었다. 그런데 문제는 청와대가 이용근 위원장에게 공개를 종용했다는 점이다. ‘한 건 올렸다’는 사실을 국민들에게 성급히 알리려 했다는 것이 협상 참여자들의 증언이다.
결국 대우차는 2년여간의 법정관리 끝에 겨우 20억달러를 받고 GM에 팔렸다. 그동안 공적자금 1조7000억원이 더 들어갔다.
이처럼 경제논리에 앞선 정치논리로, 때로는 대통령에 대한 충성경쟁으로 한국 기업의 해외매각은 멍이 들어갔다. 그 대가는 천문학적 규모의 국민 혈세인 공적자금의 투입이었다.
▼여론이 나쁘니 원칙도 바꿔라?▼
“여론이 나쁘니 완전감자(減資) 방안을 재검토하라.”
2001년 12월, 정부가 한빛은행 등에 2차 공적자금을 투입하면서 기존 자본금을 모두 없애려고 하자 청와대측은 제동을 걸고 나섰다. ‘완전감자 번복’ 지시는 민정수석실에서 ‘완전감자에 대한 여론이 나쁘다’고 DJ에게 보고하자 바로 내려졌다.
하지만 정건용(鄭健溶) 금융감독위원회 부위원장은 완강하게 버텼다. 진념(陳稔) 재정경제부 장관과 이근영(李瑾榮) 금감위원장에게 “완전감자를 하면 매를 한꺼번에 10대 맞는다. 하지만 부분감자를 하면 처음에는 적게 맞을지 몰라도 두고두고 30대는 맞는다. 어차피 맞을 바에야 화끈하게 맞고 일을 제대로 해야 한다”며 완전감자를 관철해야 한다고 진언했다.
결국 소액 주주에게 신주인수권부사채(BW)를 청약할 수 있는 권리를 주는 보완책을 마련한 끝에 간신히 완전감자가 이뤄졌다. 이헌재 전 재경부 장관이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은행의 완전감자는 없다”고 밝혔던 만큼 여론은 들끓었다.
그러나 구조조정의 원칙인 ‘투자자 및 대주주의 책임’은 제대로 지켜지지 못했다. 정 전 부위원장은 “은행의 2차 구조조정은 1998년 6월의 1차 조정 때처럼 자산부채이전(P&A) 방식으로 이뤄져야 했다. 1999년 8월, 투자신탁의 대우채권 문제도 투자자 책임이란 원칙에 따라야 했다. 하지만 그런 원칙이 지켜지지 못함으로써 공적자금이 당초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이 들어갔다”고 지적했다.
공적자금은 올 5월 말까지 160조4000억원이 투입됐다. 이는 재경부가 1차로 조성했던 64조원보다 2.5배 늘어난 것이다. 잘못된 구조조정 원칙이 공적자금 투입을 그만큼 늘렸던 것이다.
▼특별취재팀▼
▽팀장=이동관 정치부장
▽정치부=반병희 차장
박성원 최영해 김영식 부형권 이명건 이승헌 기자
▽경제부=홍찬선 박중현 김두영 기자
▽기획특집부=윤승모 차장급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