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정권 6개월을 맞는 요즘 한국 정치엔 기괴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정권 초라면 국민을 이끌고 가려는 역동감이 여기저기서 꿈틀거려야 할 때인데도 되레 ‘못해 먹겠다’는 소리가 더 크게 들리는 형국이니 기괴하달 수밖에 없다. ‘정당과 국회를 지배 못하는 대통령’이니, ‘언론으로부터 속수무책으로 공격받는 대통령’이니 하는 대통령의 말을 어떻게 읽어야 할 것인가. 또 검찰 수사를 받고 있는 여당 대표가 음모론에 볼멘소리를 내는 연유는 무엇인가. 이렇다 보니 지금 정치판엔 피해자들만 보인다. ‘나는 지금 억울하게 당하고 있다’는 측은한 모습의 경연장이 된 듯하다. 언제부터 ‘피해자 정치판’으로 둔갑했는지 모를 일이다.
▼대통령 말 속에 숨은 뜻 ▼
정치인들의 말에는 계산된 의도가 숨어 있는 법이다. 특히 대통령의 말을 자세히 보면 함축된 의미가 있다. 이번뿐이 아니다. 그 말 속에는 힘겨운 정치구도 속에 처했다는 점과 함께 억압받는 피해자의 모습을 은연중에 전하고 있음을 살필 수 있다. 피해를 강조하지만 원인에 대한 자성은 찾아보기 힘들다. 또 자해는 아닌지도 따져 봐야 할 문제다. 어찌됐든 그 숨은 뜻은 무엇을 겨냥한 것일까. 한마디로 국민의 동정심을 자극해 지지를 유도해 보겠다는 것 아닌가. 짜릿했던 대선 때 승리를 생각해서 그랬다면 사정이 달라진 줄도 알아야 한다. 그땐 함성에 묻히고 베일에 싸인 것이 많았으나 이젠 속이 다 드러난 상태다. 예전 지지를 그대로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착각이다. 최근의 낮은 지지율이 가볍게 볼 일인가. 특히 유념할 것은 설령 동정심이 일더라도 찰나적 공감일 뿐 지속적 지지와는 다르다는 점이다. 국정운영에 필요한 것은 지속적인 지지이지 순간적인 동정심은 아니다. 이것이 ‘동정정치’의 한계다.
까놓고 말해서 ‘동정정치’는 내년 4월 17대 국회의원 총선거와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대통령은 당정 분리를 강조했고 최근엔 총선에서 과반수 의석 확보에 연연치 않겠다는 말까지 했다. 소수정권의 쓰라림을 톡톡히 맛보고 있는 현 정권에 내년 총선은 얼마나 중요한 선거인가. 그런데도 대통령이 왜 그런 말을 했겠는가. 여기서 얼핏 부각되는 것이 다수야당에 둘러싸인 대통령의 모습이다. 더욱이 피해자의 모습은 이미 보여 온 터다. 이쯤되면 유권자의 동정심을 자극할 분위기가 될 만하지 않은가. 선거전략으로는 유효한 방법일지 모른다. 그러나 구차스럽다. 어려운 상황을 스스로 극복하겠다는 의지는 없이 남의 힘을 빌려 보자는 심리가 바로 동정심 유발로 나타난 것 아닌가. 그것은 자기 취약점의 호도술이지 당당한 모습이 아니다. 최근 시중에 나도는 대통령을 빗댄 개구리 농담 중에 ‘때때로 슬피 운다’는 대목이 끼어들 정도가 됐다. 개혁을 표방하면서 한편으론 그런 말초적인 방법을 구사했을 때 ‘꼼수’라고 비판한다면 뭐라 대답할 것인가. 과연 아닌가.
과반수 의석에 초연하겠다는 대통령의 발언이 전해지면서 여권에선 그 전망은 불투명하지만 ‘합의이혼’이란 기이한 정치신조어가 나돌았다. 민주당과 신당세력이 일단 갈라서서 각개 약진한 뒤 극적인 공조연대를 구축한다는 내용이다. 오비이락(烏飛梨落)일까. 합의이혼이란 것도 따지고 보면 신당은 영남권을, 민주당은 호남권을 공략한다는 동정표의 지역분담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DJ정권 출범 때 공조 효과를 맛본 경험에서 나올 법한 이야기다. 그러나 그것은 어떻게 해서든 이기고 보자는 ‘당의정 전술’이지 나라를 어떻게 끌어가겠다는 국가전략으로 심판받겠다는 당당한 자세가 아니다.
▼사회 지도세력이 없다 ▼
이제 정색하고 정치판을 똑바로 보자. 지금 사회엔 핵심이 없다. 앓는 소리나 하고 남의 탓만 할 뿐 사회적 역동성을 이끌어 나갈 지도세력이 없다는 뜻이다. 대통령이 있고, 집권세력이 있는데 무슨 소리냐고 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집권세력은 지금 지도세력이 아니다. 국민적 에너지를 모아 나가겠다는 의지도 능력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통합이 도약의 디딤돌’이라고 외치면서도 국민적 합의 도출에 실패한 지난 6개월이 이를 말해주고 있다. 깊어가는 사회적 갈등도 문제다. 그러나 합의된 지향점과 역동성이 없다는 것은 더 큰 문제다. 그런데도 언제까지 앓는 소리만 할 것인가.
최규철 논설주간 kiha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