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피’는 선거철 정치판에서 가장 자주 사용되는 단어다. 각 정당이 선거에 출마시킬 외부의 신진인사를 영입하면서 이들을 그렇게 부른다. 확실히 그 단어에서는 무엇인가 새롭게 용솟음치는 힘과 용기 기백 같은 것이 느껴진다. 유권자들도 이들이 정치판에 대거 등장하면 정치가 달라지겠구나 하는 기대감으로 표를 던지게 된다. 하지만 그동안 수없이 많은 ‘젊은 피’가 정치에 발을 들여놓았지만 정치는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기성 정치의 틀에 빠져 어느새 그들도 ‘헌 피’(늙은 피)가 되고 마는 것이다.
▷1995년 새정치국민회의 창당 때 ‘젊은 피’의 대표주자로 수혈됐던 허인회씨가 본보 기획시리즈 ‘정치인 참회록’을 통해 고백한 2000년 총선 당시의 얘기가 우리의 후진적 정치 현실을 다시 한번 돌아보게 한다. 공천을 받기 위해 여러 중진을 찾아다니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줄서기 눈치보기 등 현실정치에 물들어 있더라는 것이다. “‘젊은 피’로 수혈됐던 내가 벌써 ‘헌 피’가 되다니”라고 한탄했다는 그의 심경이 눈에 잡히는 듯하다. 그는 또 공천 때문에 운동권 동지와 멱살잡이까지 했던 일을 떠올리며 “공천 앞에서 동지도 친구도 없이 막가는 기성정치인을 빼닮은 듯한 나의 모습이 한심스러웠다”고도 했다.
▷17대 총선이 7개월 앞으로 다가오면서 전국 곳곳에서 ‘젊은 피’들이 뛰고 있다. 정당들도 각 전문분야에서 앞서가는 ‘젊은 피’들에 욕심을 내고 있다. 하지만 지역주의 돈정치 등으로 점철된 정치 환경이 바뀌지 않은 상황에 이들이 정치판에 진입한다고 해서 정치가 하루아침에 바뀔 수는 없다. 오히려 정치판 진입을 노리는 ‘젊은 피’들 중에는 벌써부터 구태에 물든 사람이 없지 않다. 겉으론 ‘새로운 정치’를 외치면서 여전히 지역감정에 기대고 혈연 학연 등 연줄에 매달리면서 그것이 정치무대에 등장하는 가장 손쉬운 비결이라고 믿는 것이다. 나이만 젊지 실제로는 ‘헌 피’나 마찬가지다.
▷‘젊은 피’와 ‘헌 피’는 나이가 아니라 그들의 가치관 사고 행동양식을 기준으로 구분해야 옳다. 아무리 청춘이라도 생각이 고루하고 시대흐름에 뒤지면 ‘헌 피’고 아무리 노인이라 해도 생각이 바르고 진취적이면 ‘젊은 피’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도 요즘 우리 사회의 모습은 모든 것을 나이로 재단해 ‘젊은 피’ 찾기에만 급급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세상이 어떻게 변해도 건강하고 밝은 사회를 만들려면 노장청(老壯靑)의 생물학적 균형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송 영 언 논설위원 younge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