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동북부에 최악의 정전 사태가 발생했던 14일(현지시간) ‘계백장군’은 뉴욕의 한 호텔에 있었다. 영화 ‘황산벌’(10월17일 개봉)에서 계백장군 역을 맡은 박중훈. 그는 할리우드 영화 ‘비빔밥’(가제)의 출연문제 협의차 뉴욕에 머물렀던 것. “시상에 전깃불이 탁 나가분께, 세계 최고도시고 뭐시고 암짝에도 쓰잘 데가 없어불데 잉. 가슴이 벌렁벌렁허고 기분이 솔찬히 껄적지근 해불데. 그래도 나가 누구여. 동아일보에 거의 1년간 칼럼(‘박중훈의 세상스크린’)을 쓴 인간인디. 글을 냄기고 싶더라구.” 27일 만난 그에게 대뜸 “장군! 그 칠흙 같은 어둠 속에서 무슨 생각을 하셨습니까?”라고 물었다. 이에 ‘장군’은 자신의 칼럼니스트 경력을 모르냐는 듯 씩 웃으며 단박에 ‘개그 화살’로 응수했다.》
▼뉴욕에서
‘비빔밥’은 박중훈이 조연으로 출연한 ‘찰리의 진실’을 작업했던 피터 셰라프가 프로듀서를 맡았다. 식당 웨이터인 동양 남성과 신문에 음식 비평을 쓰는 백인 여성의 사랑을 그린 로맨틱 코미디. 배우 개런티를 빼고 제작비 2000만 달러(약 235억원) 정도가 투입돼 내년 3월경 촬영에 들어간다. 주연인 그의 출연료는 100만 달러(약 12억원)선. 할리우드 데뷔작 ‘찰리의 진실’ 출연료가 32만5000달러(약 4억원)였던데 비하면 3배 가까운 액수다. 한국 배우가 주연으로 할리우드에 입성하는 것은 한국 감독의 국제영화제 수상에 비유될 만한 큰 ‘사건’이다.
●로맨틱 코미디…출연료 100만달러
조나단 드 미 감독(왼쪽)과 박중훈.
“악역이나 조연, 무술 영화가 아니란 점에서 이미 성공했다고 생각한다. 저우룬파(周潤發) 청룽(成龍) 등 할리우드에서 성공한 동양 배우는 대부분 액션 배우 아닌가.”
감독과 상대 여배우는 아직 미정이다. ‘양들의 침묵’ ‘필라델피아’ ‘찰리의 진실’의 조나단 드미 감독이 연출할 가능성도 있다. 여주인공의 경우 드미 감독은 카메론 디아즈나 귀네스 팰트로, 프로듀서인 피터 셰라프는 드루 배리모어를 추천했다고 한다.
●귀네스 팰트로등 상대역 물망
“흥행 공식에 철저한 할리우드에서 동양의 ‘무명 신인 배우’에게 어떻게 흥행을 맡기겠나. 이를 테면 ‘싸이더스’의 차승재 대표가 이번엔 남자 배우가 무명이니까 여배우는 ‘센’ 배우를 캐스팅하자는 식이다. 드미나 셰라프니까 가능한 얘기다.”
‘비빔밥’의 시나리오 작가 및 현지 스태프들에 포위됐지만 ‘장군’의 기개는 역시 남달랐다.
“전 세계적으로 백인은 대체로 우월한 이미지를 구축했고, 흑인은 비교적 친숙한 이미지를 갖고 있다. 히스패닉은 열정으로, 동양 여성은 신비함으로 기억된다. 동양 남자가 가장 인기 없다. 키 작고 유머를 모르는, 매력 없는 남성이다. 난 ‘생각하는 남자’(thingking man)의 캐릭터를 원한다.”
▼황산벌에서
영화 ‘황산벌’은 삼국시대 군사들이 현재의 사투리를 쓴다는 가정 하에 황산벌 전투의 전후 상황을 담은 역사 코미디.
정진영과 오지명이 각각 김유신과 의자왕으로 출연했다. ‘장군’의 호언장담은 황산벌에 들어서자 클라이맥스에 이른다.
“‘대박’은 벌써 예감됐다. 남은 것은 흥행 기록을 깰 수 있느냐다.”
계백은 출정에 앞서 가족을 먼저 칼로 베는 장면에서 말한다.
“호랭이는 죽어서 꺼죽을 냄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냄긴다고 혔다”(계백)
●"흥행 염두에 두고 찍었죠"
'황산벌'에서 계백장군으로 출연한 박중훈.
“뭐시 어쩌구 어쪄? 호랭이는 가죽 땜세 디지고 사람은 이름 땜세 디지는 거여. 이 인간아.”(계백 처·김선아)
하지만 그는 이 작품이 생각 없이 웃기기만 하는 코미디로 비쳐지는 것을 경계했다.
“감독의 주문이 ‘박중훈씨 코미디 하면 안돼요’였다. 사투리라는 장치와 상황 설정 자체가 코믹하기 때문에 비극의 주인공이 돼 달라는 뜻이었다. 웃음과 함께 페이소스가 담긴 작품이다.”
●'할리우드 城’도 공략 나서
그는 ‘황산벌’을 흥행을 염두에 두고 찍은 작품이라고 했다. ‘코미디=박중훈’이라는 보증수표를 감춘 채 변신을 시도했던 ‘세이 예스’ ‘불후의 명작’ ‘찰리의 진실’이 잇따라 흥행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의미 있는 작업이었지만 관객이 없어 외로웠다. 이번에는 큰 사랑을 받았으면 한다.”
박중훈은 20년 가깝게 ‘한국영화의 성(城)’을 지켜오다 이제 ‘할리우드 성’을 공략하기 위해 혈혈단신 외롭게 여행을 떠난다.
그를 21세기 한국 영화를 대표하는 ‘계백 장군’이라고 한다면 과장일까.
김갑식기자 gskim@donga.com
▼"언젠가 펜으로 인사 드릴게요"▼
14일 미국, 캐나다 동부가 정전됐던 순간 전 마침 뉴욕의 한 호텔에 있었습니다. 밤새 울려대는 사이렌 소리는 불안을 지나 공포스러울 정도였고 저 또한 불길한 마음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로비에서 사람들과 한동안 이야기를 나누다 걸어서 12층 제 방으로 돌아와 땀을 식히며 촛불을 멍하니 바라보다 지긋이 눈을 감았습니다.
저는 어느새 또 글을 쓰고 있었습니다.
2년 전 매주 ‘박중훈의 세상스크린’이라는 칼럼으로 동아일보 독자들과 만났던 것을 혹시 기억하십니까? 글 쓰는 게 직업이 아닌 저에겐 큰 보람이었고, 또한 엄청난 곤혹스러움이기도 했습니다. 그 부담 때문에 과분한 사랑을 뒤로 하고 ‘세상스크린’을 떠났건만 이런저런 일을 겪을 때마다 마음속으로 글을 쓰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언젠가 글 쓰는 두려움이 좀 덜 해진다면 그 ‘뉴욕의 정전체험기’도, 마음속의 다른 얘기도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우선은 영화 ‘황산벌’ 이야기를 재미있게 해 드리고 나서 말이죠….
박중훈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