武信君은 죽고(2)
오래잖아 무신군 항량의 진채는 어둠 속에서 홀연히 솟은 듯한 횃불의 물결과 장함의 대군이 지르는 함성으로 에워싸였다. 파수도 제대로 세워놓지 않고 잠이 들었던 초군(楚軍)은 그 돌연한 야습을 막아낼 길이 없었다. 잠결에 이리저리 허둥대다가 누구 칼에 죽는지도 모르면서 놀란 넋이 되거나, 뿔뿔이 달아나 한 목숨 건지기에 바빴다.
놀라고 혼란스럽기는 대장군인 무신군 항량도 병졸들과 다를 바 없었다. 싸움에 거듭 이겨 적병을 흩어놓은 데다, 아직 장마가 끝나지 않아 크게 군사를 움직이기에 마땅찮은 일기라 더욱 마음을 놓고 있던 그였다. 초저녁 술까지 얼큰해 잠자리에 들었던 그가 함성소리와 불빛에 놀라 깨어났을 때는 벌써 진군(秦軍)이 진채 깊숙이 휩쓸고 든 뒤였다.
“누구냐? 무슨 일이냐?”
전포도 제대로 걸치지 못한 항량이 겨우 찾아든 장검을 빼들고 군막을 나서며 소리쳤다. 그러나 바깥에서 들리는 것은 창칼 부딪는 소리와 기세 좋은 함성에 뒤섞인 불길한 비명소리 뿐, 누구 하나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제야 한줄기 한기와도 같은 두려움이 대담하면서도 빈틈없던 심장 한구석에서도 피어올랐다. 장검을 끌어당겨 가슴을 보호하며 항량이 다시 한번 소리쳤다.
“밖에 아무도 없느냐? 어서 말을 끌어오너라.”
그때 장막이 펄럭 젖히며 한신이 뛰어들었다. 갑옷 투구를 갖추고 있었지만 평소 같지 않게 허둥대기는 한신도 다른 군사들과 마찬가지였다. 풀어놓은 엄심갑(掩心甲)을 집어 항량에게 내밀면서 다급하게 말했다.
“장군, 우선 이것이라도 걸치시고 군막 뒤쪽으로 뚫고 나가십시오. 앞쪽은 수자기(帥字旗)를 알아본 적병들로 막혔습니다”
그런 다음 자신은 칼을 빼들고 군막 입구를 지키기라도 하듯 가로막고 섰다.
“일이 벌써 그렇게 엄중하게 내몰렸는가….”
항량은 입으로는 그렇게 탄식하면서도 엄심갑을 받아 가슴에 걸치고 군막 뒤쪽으로 달려갔다. 그곳에도 군막 한 자락만 들치면 밖으로 나갈 길이 있었으나 마음이 급하니 그걸 찾을 겨를이 없었다. 칼로 군막 한쪽을 길게 찢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항량이 돌아보니 자신의 군막 앞쪽에서는 벌써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거기다가 무슨 명을 받았는지, 진병(秦兵)들은 유독 그곳을 두텁게 에워싸고 몇 안 남은 초군 호위병사들을 멧돼지 몰듯했다.
“장군. 멈추셔서는 아니 됩니다. 어서 이곳을 빠져나가십시오. 저는 이쪽으로 치고 나가겠습니다. 일없이 난군을 뚫고 나가시거든 진채 서북쪽 작은 숲에서 기다리십시오. 제가 말을 찾는 대로 그리 달려가겠습니다.”
뒤따라온 한신이 그렇게 말하고는 적병이 가장 많이 몰린 쪽으로 칼을 휘두르며 뛰어들었다. 여덟 자가 넘는 키에 갑주로 둘러싼 우람한 몸피가 힘을 다해 치고 들자 적병은 그 엄청난 기세에 잠시 주춤했다. 하지만 그 혼자인 것을 알고는 다시 함성과 함께 에워싸니 한신은 이내 사람의 물결 속에 가라앉듯 사라져버렸다.
퍼뜩 정신을 차린 항량도 칼을 높이 쳐들고 몸을 빼낼 곳을 찾았다. 사람의 벽이 엷은 곳을 골라 무서운 기세로 치고 들면 잡병들 여남은 명쯤은 뚫고 나갈 듯도 싶었다.
“비켜라. 길을 막는 자는 벤다!”
이윽고 한군데 만만한 곳을 찾아낸 항량이 그런 호통과 함께 장검을 휘두르며 뛰어들었다. 원래도 무예 단련을 게을리 해온 항량이 아닌데다, 위기로 몰린 생존의 본능이 다시 있는 힘을 다 짜내게 하니 그 기세가 여간 날카롭지 않았다. 금세 가로막은 사람의 벽이 흩어지며 훤히 길이 열렸다.
항량은 한동안 아무 생각 없이 앞으로 내달았다. 화살이 날아오면 피하고 가로막는 자가 있으면 베며 에움의 중심에서 빠져나가는 데만 온 힘을 다 쏟았다. 하지만 그럭저럭 에움을 벗어났다 싶자 갑자기 가슴속에서 빳빳이 고개를 드는 의식이 있었다. 오중(吳中)을 떠난 뒤로 반년, 그 동안의 잇따른 승리와 득의가 그의 가슴속에 기른 독버섯 같은 자부(自負)와 독선(獨善)이었다.
(내가 지금 무얼 하고 있느냐. 한목숨 건지겠다고 이렇게 허둥대고 있는 것이냐. 어떤 것은 잃어도 되찾을 수가 있고 무너져도 다시 일으킬 수 있지만, 어떤 것은 한 번 잃고 무너지면 영영 회복할 수 없다. 내 이력도 그렇다. 오중 뒷골목 건달패에서 오늘날의 무신군 항량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쌓아온 자랑이며 영광인가. 그 이력은 한번 무너지면 영영 되일으켜 세울 수 없다. 여기서 한목숨 건진다해도 그 자랑과 영광을 잃어버리면 살아도 사는 것 같지 않는 삶이 되고 말 것이다. 이렇게 물러나서는 안 된다. 어떻게든 이 상황을 뒤엎어 불패(不敗)의 신화를 한번 더 쌓아 올려야 한다….)
그러면서 걸음을 멈춘 항량은 무엇에 홀린 사람처럼 뒤돌아 섰다. 그리고 저만치 멀어진 횃불 쪽으로 달려가 횃불 하나를 뺏어들고 큰 소리로 외쳤다.
“초나라 장졸들은 들으라. 나는 무신군 항량이다. 이제 여기서 싸우다 죽기로 했으니, 그대들도 모두 떨쳐 일어나 적을 무찌르라. 죽기로 싸워 진채를 지켜내라!”
그리고 스스로 진병들이 몰린 곳으로 뛰어들었다. 그런 항량에게는 틀림없이 장렬하고도 개결(介潔)한 영웅의 풍도가 있었으나, 어지러운 시대의 마구잡이 싸움터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항량의 외침은 이미 기세가 꺾인 초나라 장졸을 분기시키기보다는 공을 다투는 진나라 장졸들만 떼로 불러들였을 뿐이었다.
“항량이 여기 있다. 항량을 잡아라!”
“항량을 놓치지 마라. 그를 죽여 이 싸움을 끝내자!”
진나라 장졸이 서로 그렇게 외쳐가며 항량을 에워싸고 번갈아 창칼을 내질렀다. 아무리 무예단련을 게을리 하지 않은 항량이고, 또 죽기로 싸우고 있다고는 하지만, 혼자서 무슨 수로 마음먹고 몰려드는 진나라의 수백 장졸들을 당해내겠는가. 오래잖아 항량은 다져진 고깃덩이처럼 되어 어지럽게 뒤얽힌 군사들 속에서 죽고 말았다.
하지만 항량의 그같은 죽음이 전혀 헛된 것은 아니었다. 그의 죽음으로 싸움도 결판이 났다고 여겨서였을까, 다른 장수들을 쫓는 진나라 군사들의 마음세가 느슨해졌다. 그 바람에 계포를 비롯한 많은 장수들과 한신, 범증까지도 크게 다치지 않고 정도(定陶)에서 몸을 빼낼 수 있었다.
그 무렵 항우는 유방과 더불어 진류(陳留)에 머물고 있었다. 옹구(雍丘)에서 삼천군수 이유(李由)를 목 벤 뒤 다시 외황(外黃)으로 밀고 들었으나, 진나라가 굳게 지켜 그 성을 떨어뜨리지 못하고 진류로 군사를 돌린 것이었다. 하지만 진류를 지키는 진병(秦兵)도 만만치 않아 어려운 싸움을 하고 있는데, 피를 뒤집어 쓴 듯한 한신이 말을 달려왔다.
“정도가 떨어지고 무신군께서는 그만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처음 한신이 그렇게 말했을 때만 해도 항우는 도무지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막 아침상을 물리고 유방과 함께 그날의 출전을 논의하려던 항우는 어이가 없어 되물었다.
“뭐야? 정도가 어쩌고 계부(季父)님이 어찌 되셨다고?”
“어젯밤 장함이 대군을 몰아 갑작스레 야습을 해왔습니다. 워낙 창졸간에 당한 일이라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그제야 항우도 한신이 전하고 있는 소식이 무언지 겨우 알아들었다. 금세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벌떡 몸을 일으키며 소리를 질렀다.
“계부님께서 돌아가셨다면 너는 어떻게 살았느냐?”
“함께 군막을 빠져 나왔을 때는 이미 적병이 두텁게 우리를 에워싸고 있었습니다. 이에 각기 길을 열어 에움을 벗어난 뒤에 다시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지요. 그 뒤 겨우 몸을 빼낸 제가 어렵게 말을 구해 약조한 곳에서 기다리는데…. 무신군께서 돌아가셨으니 모두 항복하라는 적병이 외침이 들렸습니다.”
“그래도 도무지 믿을 수가 없다. 장함이 몇 번씩이나 써먹은 그 잔꾀에 계부님께서 당하시다니….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다 무얼 하고 있었느냐? 너도 처음 우리 군문(軍門)에 들 때는 병법(兵法)이라면 남에게 지지 않는다고 큰소리 친 걸로 들었는데….”
“계포 장군과 범증 군사(軍師)께서도 걱정하셨고, 집극랑(執戟郞)에 불과한 저도 말씀 올린바 있습니다만 무신군께서 들어주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군심(軍心)을 어지럽히신다 꾸짖으시며….”
“시끄럽다. 도대체 장군이란 게 무어고 군사는 또 뭐냐?. 너도 일 후 내 앞에서는 두 번 다시 병법을 말하지 마라. 뻔히 보고 있으면서 몇 만 대군을 모두 잃고 그 상장군까지 죽게 만드는 게 병법이냐?”
그리고는 죄 없는 한신만 쥐잡듯 몰아대다 내쫓았다. 한신은 그 뒤로도 일년 넘게 항우를 따라 싸움터를 누비지만 끝내 무겁게 쓰이지 못하고 유방에게로 달아나게 되는데, 어쩌면 항우가 한신을 믿지 못하게 된 것은 그때부터였는지도 모른다. 그날 해를 넘기지 않고 계포가 찾아들고 다음날에는 다시 범증이 항우를 찾아왔다.
항량이 생전에 가까이 두고 부리던 이들이 나타나 눈물로 항량의 죽음을 알려오자 항우도 비로소 그 죽음이 실감이 났다. 돌이켜보면 항량은 항우에게 그 어떤 아버지보다 자애로운 아버지요, 그 어떤 스승보다 더 밝고 어진 스승이었다. 항우는 자신이 스물 다섯 살을 넘은 대장부요, 몇 만의 대군을 거느린 장수라는 것도 잊고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다가 소리소리 복수를 맹서했다.
“무도한 진나라야. 장차 너희 군사는 모두 산 채 땅에 묻히고 궁궐은 서까래 하나 성하게 남아나지 못할 것이다. 장함아. 내 반드시 너를 사로잡아 네 고기를 씹으리라!”
하지만 모질고 독한 게 현실이요, 살아있는 목숨이었다. 정도에 있던 본부군(本部軍)이 무너지고 하늘같이 우러러보던 항량까지 죽었다는 소문이 돌자 항우가 이끈 사졸(士卒)들은 한결같이 겁에 질려 떨었다. 항우와 같은 복수심은 커녕 진나라 군사들의 그림자만 보아도 그대로 내뺄 것 같은 표정들이었다.
흔히 항우는 성격이 급하고 격정적인 사람으로만 알려져 있다. 그래서 일쑤 무모하고 고집스럽게 묘사되는데, 그 무렵의 처신을 보면 꼭 그렇지도 않은 듯하다. 젊은 혈기 때문에 더 억누르기 어려웠을 분노와 슬픔을 용케 억누르고, 냉정하게 진퇴를 따져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글 이문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