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똥개’ ‘싱글즈’ ‘바람난 가족’의 공통점은? 2003년 개봉돼 영화 전문가들의 비관적 예상을 뒤집고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들과 ‘맞장’을 떠 멋지게 역전한 한국 영화라는 점이다. 지금도 개봉관 수를 늘려가며 상영되고 있는 ‘바람난 가족’은 “영화는 좋지만 절대 흥행은 안 될 것”이라는 평을 받으며 모든 투자사들로부터 외면당했다. 그러나 일반 관객들은 시사회 후 인터넷펀딩을 통해 몇 시간 만에 거액의 제작비를 지원(?)했다.
소위 ‘전문가’들이 “흥행을 보장하는 스타도 없고, 스펙터클하지도 않다”고 흥행을 비관한 영화들이 입소문을 타고 장기 흥행에 성공했다는 것은 붕어빵처럼 찍혀 나오는 여타 ‘기획’ 영화들과는 달리 우리의 현실에 접근하여 ‘우리끼리 통하는’ 이야기로 ‘공감’을 얻는 데 성공했다는 의미다.
이 영화들은 공통적으로 주인공 한 사람을 내세우는 스타 시스템을 피하는 대신 연기파 배우들을 기용해 우리가 어디선가 만났음 직한 캐릭터들을 만들어냈다. 올해 충무로가 거둔 가장 큰 수확 중 하나도 ‘똥개’와 ‘싱글즈’ ‘바람난 가족’을 통해 스타가 아니라 김태욱과 이범수, 황정민이라는 뛰어난 배우를 발견한 것일 것이다.
◇ 오랜 무명 설움 ‘공통점’
무뚝뚝한 동성애자로 나온 ‘로드무비’(왼쪽)와 위선적인 변호사를 연기한 ‘바람난 가족’은 정 많고 열정적인 황정민의 원래 성격과는 판이하게 다르지만 모두 호평을 받았다.
황정민(34)
계원예고, 서울예대 졸업
영화 데뷔작 ‘와이키키 브라더스’(2001)
출연작 ‘YMCA야구단’(2002) ‘로드무비’(2002) ‘바람난 가족’(2003) 연극 ‘가스펠’ ‘개똥이’ ‘의형제’ ‘캣츠’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 ‘지하철 1호선’ 외 다수
지방 소도시에 사는 건달들의 삽화인 ‘똥개’에서는 정우성이 아니라 그를 괴롭히는 진묵 역의 김태욱을 통해 ‘3류’ 인생을 사는 남자들의 삶이 분명하게 다가온다. 네 가지 캐릭터의 싱글들이 엮어가는 ‘싱글즈’에서 이범수(정준 역)는 대학 나오고 세상물정도 알 만큼 알지만 영악하게 살 주변머리는 없는 착한 남자의 전형이다. ‘바람난 가족’에서 주영작 변호사 역을 맡은 황정민은 공적으로는 정의로우면서, 사적으로는 가부장적이고 바람을 피우며 부인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두 얼굴을 가진 중상류층 엘리트 남성을 대표한다.
이들은 한국 사회에서 무능력자이거나 나쁜 놈이거나 위선적인 남자의 전형이지만, 스스로 악과 손잡은 게 아니라 제도와 관습이 비틀어놓은 기형아이기도 하다. 영화가 다층적 의미를 갖기 위해, 그리고 공정한 게임이 되기 위해 건달 진묵이나 백수인 정준, 주변호사는 특히 여성 관객들로부터 미움만 받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친구 중에도 주영작처럼 ‘싸가지 없는’ 인간은 없어서 연기하기 무척 힘들었어요. 특히 바람 피웠다고 아내(문소리)를 때리는 장면에선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이러나 싶기도 했고…. 결국 ‘주영작도 자기의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남자다, 내가 그 대변인이다’라고 맘먹었는데 관객들이 ‘처연’한 인물로 봐주셔서 감사하지요. 그 인간, 좀 성숙해지기 바라요.”(황정민)
제작자와 감독의 머릿속에서 이렇게 까다로운 역할을 맡을 배우가 일찌감치 결정된 건 당연했다. ‘바람난 가족’의 제작자인 심보경 이사(명필름)는 “황정민은 우리가 진작부터 신뢰한 배우였다. 여주인공이 김혜수에서 문소리로 바뀌는 와중에도 다른 누가 주영작을 연기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처음부터 ‘똥개’의 진묵 역으로 김태욱을 점찍은 곽경택 감독은 “진묵은 큰 물에 나서기엔 간이 작은 지방 건달로 관객들이 영화를 보는 동안은 미워해도 극장 밖에서 만났을 때 친근함을 느껴야 했다. 그게 바로 김태욱이었다”고 한다. 이범수의 경우도 ‘싱글즈’의 권칠인 감독의 부탁을 받아 ‘우정출연’ 형식으로 주연급 배역을 맡았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세 배우는 영화에 데뷔하기 전 오랫동안 연극과 뮤지컬에서 연기력을 쌓았고 꽤 이름도 날렸다. 그러나 충무로에 데뷔한 이후 인터뷰 때마다 “영화엔 단역과 주·조연이 따로 없다”(이범수)고 말하며 스스로 위안했을 만큼 단역과 조연을 전전했다.
14년간의 조·단역 생활을 끝내고 주인공이 된 이범수. ‘싱글즈’(아래 왼쪽)와 ‘오! 브라더스’를 통해 ‘착한 남자’의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이범수(34)
중앙대 연극영화과 졸업
영화 데뷔작 ‘그래 가끔 하늘을 보자’(1990)
출연작 다수의 연극과 영화 ‘지상만가’(1997)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1998) ‘태양은 없다’(1998) ‘정글쥬스’(2002) ‘일단 뛰어’(2002) ‘싱글즈’(2003) ‘오! 브라더스’(2003) ‘안녕! UFO’(예정) 외 다수
중앙대 재학 시절 늘 4학년이 맡던 ‘햄릿’ 역을 2학년 때 따낼 만큼 인정받았던 이범수는 데뷔 후 14년 동안 독특한 마스크 때문에 웨이터, 양아치 역 단골 조연이었다. 그래서인지 그의 배우론은 거의 비장하기까지 하다.
“좋은 배우라…, 예산 절약해주는 배우? 감독 말을 정확히 따르는 배우? 아뇨, 좋은 배우는 관객들의 존재를 인식하고 소통할 준비가 돼 있는 사람이에요.”
9월5일 개봉을 기다리는 ‘오! 브라더스’에서 조로증에 걸린 12살 어린이를 연기하는 이범수는 오버하지 않고 순수함을 보여주는 어려운 ‘곡예’에 성공했다.
“영화 데뷔 이후 한 번도 원래 성격과 비슷한 역을 해본 적이 없다. 동성애자로 나온 ‘로드무비’를 촬영하는 동안에는 스트레스로 피부병에 걸리기까지 했다”고 말하는 황정민은 그러나 충무로에서 “무슨 역을 맡기든 미친 듯 매달려 결국 ‘황정민스러운’ 캐릭터를 완성한다”는 칭찬을 듣는다.
“이 땅에서 사는 사람들이 고민하는 얘기, 사람 사는 얘기를 담은 시나리오를 골라왔어요. 그리고 촬영할 땐 거의 매순간 너 거짓말하지 않고 연기하니, 하고 자문해요. 거짓말 안 하는 연기가 진짜 연기거든요.”
그러면서 그는 대화 중에 IMF 외환위기 때 빚을 져 가족들이 위기와 갈등을 겪었던 사연, 데뷔 당시보다 6배가 오른 영화출연료로 그 빚을 열심히 갚고 있다는 얘기를 끼워넣는다. 과연 ‘로드무비’에서 보여준 과묵함, ‘바람난 가족’에서 빚어내는 냉정함과는 정반대의 느낌을 주는 감정적이고 솔직한 인물이다.
앞서 두 배우에 비하면 연기자 생활 8년차인 김태욱은 비교적 ‘빨리’ 스타덤을 향해 간 배우다.
곽경택 감독은 “‘친구’의 캐스팅을 위해 김태욱을 처음 만난 자리에서 ‘유오성 오른팔인 ‘도루코’ 역인데 얼굴에 양아치스런 느낌이 없어 걱정된다’고 했더니 ‘감독님 원하는 대로 만들어볼게요’ 했다. 정말 얼마나 잘했는지 내가 좋아서 고함을 지를 정도였다”고 했다.
◇ 숱한 조연과 단역이 ‘연기 재산’
김태욱의 얼굴에선 곽경택 감독의 우려처럼 ‘양아치스러움’을 찾아볼 수 없다. 그래서 ‘똥개’를 찍을 때 고민도 많았다.
김태욱(31)
경성대 연극과 졸업
영화 데뷔작 ‘이재수의 난’(1999)
출연작 ‘친구’(2001) ‘해적, 디스코왕 되다’(2002) ‘똥개’(2003) 연극 ‘그녀를 열어봐’ 외 다수
“‘똥개’의 진묵은 도루코와 차별화하는 것이 제일 큰 일이었는데 마침 모델이 될 만한 경상도 건달을 하나 ‘만나’ 연기 지도를 받았죠.”(김태욱)
‘똥개’를 찍을 때 그의 또 다른 과제는 몸무게를 늘리는 것이었다. 생활을 위해 부산에서 자신과 부모님이 운영했던 통닭집에서 매일 닭 1마리와 계란 12개를 먹어 17kg을 늘렸던 그는 다시 10kg을 줄여 홀쭉해져 있었다.
팬티 한 장 달랑 입고 정우성과 투견처럼 주먹싸움을 한 뒤-그는 ‘맞는 신’이라 말했다-앰뷸런스에 실려갔던 그는 “그래도 뭐, 계속 운동을 해서인지 며칠 만에 다 낫던걸요”라고 한다.
배우를 연기로 평가할 수 있게 된 건, 그래서 이들을 발견할 수 있었던 건 1차적으로 왕자님이 등장하는 단순 멜로영화가 충무로에서 사라졌기 때문이다. 영화 한 편이 복합적인 구조를 가지면서 차라리 액션과 스펙터클이 필수요소가 됐다.
특별히 이범수, 황정민, 김태욱이 돋보이는 건 너무 빨리 스타덤에 오른 남자배우들이 너무 빨리 스타 의식에 젖어버리곤 하는 충무로의 ‘빈곤함’ 때문이다. 영화 한 편으로 ‘뜬’ 배우들은 어수룩한 백수나 재수없는 변호사, 죽도록 얻어맞는 역할을-그것도 조연인- 결코 하지 않는다. 이들이 조연과 단역으로 쌓아온 자신의 필모그래피를 잊지 않기를 바라는 것도 그 때문이다.
김민경 주간동아 기자 holde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