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금융시장의 중심지 미국 뉴욕에는 하루에도 몇 번씩 해가 뜨고 진다.
런던 프랑크푸르트 싱가포르 도쿄 등 세계 각지의 금융시장이 문을 열고 닫을 때마다 뉴욕도 함께 움직이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뉴욕 금융시장에는 다양한 인종,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활동하고 있다.
WASP(White, Anglo-Saxon, Protestant·백인 앵글로색슨 개신교도로 대표되는 미국 사회의 주류층)가 지배하던 미국 금융시장에 다른 인종이 뛰어들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초반. 그중 한국인은 약 300명으로 인도인 중국인 다음으로 많다.
월가(街)의 ‘코리안 파워’를 이끄는 대표적인 인물은 손성원 미국 웰스파고 은행 수석부행장(58). 앨런 그린스펀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의 후임으로 거론되기도 하는 그는 미국 주요 경제지표가 발표될 때마다 유력 언론들의 인터뷰 요청을 받는다.
블룸버그통신은 지난해 미국의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을 가장 정확하게 예측한 인물로 손 부행장을 선정하기도 했다.
손 부행장은 1962년 광주일고를 졸업한 뒤 미국으로 건너가 플로리다 주립대에서 경제학을 공부했다. 3년 만에 최우등으로 대학을 졸업한 그는 미시간 웨인대를 거쳐 피츠버그대에서 2년 만에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이후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경제자문위원회 선임 이코노미스트로 발탁돼 매주 대통령에게 경제동향 분석을 보고하는 일을 하다가 27세의 나이에 지금의 웰스파고 은행과 합병된 노스웨스트 은행 부총재에 오르면서 월가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오전 7시 간부회의로 일과를 시작하는 그는 경제동향은 물론 인수합병(M&A)과 자산관리 등 주요 분야 의사결정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뉴욕에서 가장 높은 직위에 오른 한국인은 세계적인 투자은행 메릴린치의 김다우 공동대표(40)다. 그는 이달 초 글로벌 마켓과 투자은행 사업부문 공동대표로 전격 발탁됐지만 언론 인터뷰에 전혀 응하지 않아 국내는 물론 미국에서도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김 대표는 서울에서 태어나 6세 때 미국으로 건너가 명문 사립고인 필립스 아카데미를 거쳐 펜실베이니아대에서 경영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85년 뉴욕 매뉴팩처러스 하노버 은행의 신용분석가로 월가에 첫발을 내디딘 뒤 94년 메릴린치에 합류했다. 스탠리 오닐 메릴린치 회장은 그에 대해 “채권시장 분야에서 최고의 성공을 거두고 있다”고 극찬한다.
91년부터 코리아펀드 운용을 맡아 한국에도 잘 알려진 도이치자산운용의 존 리 전무(44). 그가 운용하는 자산규모는 1조2000억원에 이른다. 80년 연세대 경제학과 3학년을 마치고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 가 뉴욕대에서 회계학을 전공했다. 이어 유명 회계법인인 KPMG에서 7년간 일한 뒤 91년 펀드매니저로 변신했다. 그가 투자할 때 가장 중요시하는 잣대는 투명성이다. 과거 코리아펀드에 대우그룹 주식을 편입하지 않은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99년 참여연대가 삼성전자를 상대로 소액주주운동을 벌일 때 참여연대에 의결권을 위임해 전폭적으로 지지하기도 했다.
소매금융 부문에서 최고로 손꼽히는 메릴린치의 손동원 부사장(67)도 한국인들의 월가 진출을 개척한 1세대 중 한 명이다. 1000여명의 고액 자산가를 고객으로 두고 있는 그는 수탁자산 규모가 한때 뉴욕에서 20위 안에 들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고 있다.
59년 10월 샌프란시스코 부영사 신분으로 미국에 도착한 그는 67년 시어손 해밀(현 살로먼 스미스바니)에 입사해 펀드매니저로 월가 생활을 시작했다. 동양인이 많지 않던 시절, 그는 오전 4시에 일어나 시장 동향과 주요 뉴스를 챙기는 열정으로 지금의 자리까지 왔다.
그는 뉴욕에서의 ‘성공 비결’에 대해 “월가에서는 목표를 분명히 정하면 길이 보인다. 단기적인 성과에 매달리면 오래 가지 못한다. 많은 사람이 사라졌다. 진심과 신용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다.
나름대로 이런 성공비결을 체현했기 때문일까. 월가에서는 패러다임 펀드(운용자산 11억달러)를 창업한 제임스 박 사장(40)을 비롯해 운용자산 25억달러의 디스커버리 캐피털 매니지먼트의 데이비드 전 전무(40), 헤지펀드 L-R글로벌의 애널리스트 매튜 장(28), 반얀펀드매니지먼트의 시니어 애널리스트인 제임스 한(33) 등 한국인 2세대의 활약도 꽤 눈에 띈다.
신치영기자 higgled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