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6월 서울 서초구 서초동에 위치한 서울시정개발연구원에서 열린 한국지역학회 학술대회. 100여명의 교수와 전문가들이 참가한 이날 행사는 엄숙하고 딱딱하기 십상인 여느 학술대회와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게 화기애애했다. 부르는 호칭도 ‘○○교수’보다는 ‘○○선배’가 대부분이었다.
이 같은 분위기는 이들이 대부분 국토연구원에서 한솥밥을 먹던 사이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날 참석자들은 “마치 국토연구원 ‘홈커밍 데이’가 열린 게 아닌가 하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였다”고 전했다. 실제로 국토계획 관련 학계에서 ‘한국의 국토계획전문가는 국토연구원 출신이냐 아니냐의 두 부류로 나뉜다’는 우스개가 나돌 정도다.
▽국토공간의 총괄 설계자=일반인에게 국토연구원은 건설교통부의 주택정책이나 부동산 관련 정부정책을 기획하는 국책연구소 정도로 인식되고 있다. 하지만 이는 대단히 잘못된 생각이다.국토연구원은 한반도 전체를 어떤 식으로 활용할 것인가를 결정하고 방법을 제시하는 설계기관이다. 도로 철도 등 국가 기간시설의 위치를 결정하고 신도시를 계획하며 정부의 국토균형발전정책을 만든다. 또 신행정수도의 위치를 고민하고 통일시대의 국토이용 방안을 수립하며 소득 2만달러 시대를 향한 국민생활의 청사진을 제시하는 일도 국토연구원의 몫이다. 국토연구원이 만드는 국토종합계획은 헌법과 국토기본법에 규정된 최상위 국가계획이다.
국토연구원 주요 연구진이 월요 주간회의를 마친 뒤 경기 안양시 평촌신도시 사옥 뒷마당에 설치된 조각상 앞에 모였다. 뒷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윤양수 선임연구위원, 박양호 국토계획 환경연구실장, 김영표 GIS연구센터장, 윤주현 토지주택연구실장, 김원배 동북아연구팀장, 김흥수 민간투자지원센터소장, 진영환 선임연구위원, 박헌주 기획조정실장, 이규방 원장, 김용웅 부원장. 안양=이훈구기자
이 뿐만이 아니다. 외환위기 때는 민간투자 지원센터를 설립해 사회간접자본(SOC)에 대한 민간투자와 외자(外資)를 적극 유치하면서 국내 SOC 총괄연구기관으로 자리매김했다. 최근에는 국토의 디지털화에 앞장서면서 국가 지리정보시스템(GIS) 연구개발의 메카로 발돋움했다.
국토 활용에 얽힌 복합적인 문제를 종합적으로 연구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범(汎)정부적인 정책과제에도 빠짐없이 참여한다. 노무현(盧武鉉) 정부가 핵심과제로 추진하는 국가균형발전위원회, 동북아경제중심위원회, 정부혁신 및 지방분권위원회, 신행정수도기획단 등에서 국토연구원이 핵심 기능을 맡고 있다.
▽국토연구 전문가 양성소=국토연구원은 명실상부한 국토 관련 전문가 양성소로 평가받는다.
충북개발연구원의 이태일(李兌一) 원장을 비롯해 건설산업연구원 최병선(崔秉瑄) 원장, 주택산업연구원 고철(高鐵) 원장 등이 모두 국토연구원 출신이다.
교통개발연구원 및 건설산업연구원 원장을 지낸 이건영(李建榮) 단국대 교수, 인천발전연구원장을 맡았던 홍철(洪哲) 인천대 총장 등도 연구원의 원장을 지냈다. 전 서울시정개발연구원장 권원용(權源庸) 박사, 전 경남발전연구원장 박수영(朴秀永) 박사, 전 지방행정연구원장 박우서(朴羽緖) 박사, 전 충남발전연구원장 황용주(黃鏞周) 박사, 전 강원개발연구원장 오진모(吳鎭模) 박사, 전 건설산업연구원장 홍성웅(洪性雄) 박사 등은 연구원에서 주요 보직을 거쳤다.
고위 공무원으로 영전한 연구원도 많다. 허재영(許在榮) 전 건설교통부 장관, 조정제(趙正濟) 전 해양수산부 장관, 이상룡(李相龍) 전 노동부 장관, 이건영 전 건교부 차관 등이 모두 국토연구원 출신이다.
▽정책대변인에서 중재자로=최근 들어 국토연구원은 변신을 꾀하고 있다. 정부정책을 보좌하는 연구소 기능에 머물지 않고 이해당사자의 갈등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사안에 적극 나서서 중재자의 역할까지 맡는 것.
광역대도시권의 그린벨트(개발제한구역) 해제권역 설정을 놓고 대립하는 중앙정부와 지방자치단체, 지역주민 사이에서 해결점을 찾기 위한 공청회 등을 개최해 중재안을 만드는 일도 한다.
최근에는 전북 부안군 위도의 원전 수거물 관리센터(방사성 폐기물 처리장) 설치 문제를 놓고 정부와 갈등을 빚고 있는 부안군의 미래 청사진을 마련하기 위해 정부를 대신해서 나섰다.
연구원은 또 국토에 대한 2세 교육에도 관심을 돌려 1996년부터 매년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국토사랑 글짓기 대회’를 열고 있다.
▽연구원을 이끄는 사람들=국토연구원에는 모두 60여명의 박사급 연구원이 다양한 분야에 포진하고 있다. 분야는 도시 및 지역계획학 관련이 주류를 이루지만 경제학 건축학 환경학 공학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연구원을 이끄는 이규방(李揆邦) 원장은 미국 오하이오주립대에서 응용미시경제를 전공한 경제학박사로 지난해 말 원장에 취임했다. 김대중(金大中) 정부 초대 재정경제부 장관을 지낸 이규성(李揆成)씨의 친동생이다. 이 원장은 “올해 설립 25주년을 맞는 연구원을 지식정보시대에 걸맞은 연구기관으로 도약시키겠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 그는 올해를 ‘제2의 기관 창설의 해’로 정했다.
김용웅(金容雄) 부원장은 국내 지역개발분야에서 손꼽는 이론가이자 실무자이다. 지역개발에 관한 광범위한 이론을 체계화한 ‘지역개발론’(법문사)은 관련 분야의 필독서로 꼽힌다.
박양호(朴良浩) 국토계획환경연구 실장은 국토종합계획의 아이디어뱅크로 불린다. 국민소득 2만달러시대에 대비한 국토공간의 미래상을 제시하고 지역균형개발의 실천적인 틀을 만드는 데 주력하고 있다.
윤주현(尹珠賢) 토지주택연구실장은 주택금융전문가로 최근 주택시장에서 화두가 되고 있는 주택후분양제도의 이론적 틀을 만들고 있다.
김영표(金永杓) GIS연구센터장은 한국에 GIS 분야를 소개한 GIS학계의 대부로 불린다.
김흥수(金興洙) 민간투자지원센터 소장은 캐나다에서 교수를 하다 연구원에 들어왔다. 부드러운 이미지로 민간투자관련 협상을 무난히 이끌고 있다는 평이다.
김원배(金原培) 동북아연구팀장은 하와이 동서문화센터에서 10여년을 근무한 경력이 있는 동북아문제 전문가이다.남북통일에 대비한 연구로 북한문제에 정통하다.
박헌주(朴憲注) 기획조정실장은 토지와 주택정책의 전문가다. 국토의 난개발을 막고 선(先)계획 후(後)개발체제를 만들기 위해 올해부터 시행되고 있는 ‘국토의 계획 및 이용에 관한 법률’의 이론적인 틀과 세부시행방안 연구를 주도했다. 한국에서 몇 안 되는 스웨덴 박사.
윤양수(尹陽洙) 선임연구위원은 관광개발 전문가로서 연구원에서 진행하는 관광개발 연구 과제를 모두 맡고 있다.
진영환(陳英煥) 선임연구위원은 김대중 정부 때에는 그린벨트 조정 업무를 맡았고 현 정부에서는 신행정수도연구단의 총괄간사를 맡고 있다.
황재성기자 jsonhng@donga.com
▼국토연구원 연혁 ▼
국토연구원은 국토의 효율적인 이용 방안을 만들기 위해 설립된 조직이다.
‘제1차 국토종합개발 10개년 계획’이 1972년 처음 만들어졌다. 이 계획은 프랑스의 지역개발 및 도시계획 컨설팅회사 ‘오탐 메트라(OTAM metra)’가 주도하여 수립하였다. 당시 한국에는 관련 분야에 대한 노하우를 가진 전문가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이후 박정희(朴正熙) 전 대통령이 1978년에 “이제부터 우리의 국토 계획을 우리가 만들어 보자”며 100만원의 출연금을 내면서 국토연구원의 전신인 국토개발연구원이 출범했다. 연구원은 99년 1월 국토 개발뿐만 아니라 국토의 환경 보전에도 역점을 두겠다는 취지에서 이름을 ‘국토연구원’으로 바꿨다.
연구원은 해마다 150여권의 보고서를 발간한다. 연구원은 자체적으로 진행하는 연구심의회와 우수연구논문 발굴을 위한 경쟁체제를 도입해 보고서의 품질을 관리한다.
연구심의회는 연구 착수, 중간보고서, 최종보고서 등이 진행될 때마다 열린다. 연구심의회의 심의위원은 대내외 전문가와 공무원, 언론인 등으로 구성된다. 심의는 가혹할 정도로 냉정하게 진행된다. 평가 결과는 우수보고서 선정 및 연구진의 연봉과 직접 연결된다.
연구원은 국내외 전문가를 활용한 네트워크형 협동 연구도 적극 장려한다. 이 같은 노력의 결과로 연구원은 2002년 국무총리실 경제사회연구회 산하 14개 국책연구기관 평가에서 1위를 차지했다.
연구원은 올해부터 정책 현안에 대해 바람직한 대안을 제시하고 국토분야의 주요 이슈를 알기 쉽게 설명하는 ‘국토정책 브리프’를 매주 발간하고 있다. 관련분야의 핵심 내용만 정리한 4∼6쪽 분량의 이 보고서는 관련 분야 공무원과 전문가들 사이에서 애독서로 자리 잡았다.
황재성기자 jsonh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