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말 김화중 보건복지부 장관과 수행비서인 손호준 사무관(왼쪽)이 과천 정부청사를 걸어나오고 있다. 손 사무관은 늘 2m 반경 내에서 김 장관을 수행한다. 이종승기자urisesang@donga.com
《청와대에는 ‘수궁정(守宮亭)’이란 장소가 있다.일반인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이 곳은 정자 형태로 된 2평 남짓한 공간이다. 텔레비전에서는 케이블 방송이 흘러나오고, 커피믹스와 녹차 티백이 가지런히 준비돼 있다.청와대에서 국무회의가 열릴 때면 어김없이 이 곳에 모여 대기하는 이들이 있다. 각 행정부처 장관의 수행비서들이다. 대개 20대 후반∼30대 중반으로 경력 5년 미만의 5급 사무관들인 이들은 이 곳에서 ‘장관 모시기’ 노하우에 대한 허심탄회한 정보를 나눈다.》
●정보 공유
지난달 중순 국무회의가 열리던 어느 날. 여느 때와 다름없이 장관들이 청와대 본관을 향하자 수행비서와 운전기사들은 수궁정 쪽으로 몰려 왔다. 그들은 인사를 나누고, 차를 마시고, 담배를 피웠다.
수행비서들은 당시 주요 의제로 떠오른 주5일 근무제 도입 등에 대해 이야기했으며, 운전기사들은 시내에서 장관을 가장 빠르게 이동시킬 수 있는 비법을 고민하고 있었다.
그 때, 김화중(金花中) 보건복지부 장관의 수행비서인 손호준 사무관(31·고려대 영문학과 졸업)이 책 30여권을 들고 나타났다. 100여 페이지 쯤 되는 이 책 제목은 ‘만점짜리 비서되기’. 그는 다른 비서관들에게 나눠줬다.
김원길(金元吉·현 국회의원) 전 보건복지부 장관의 전 수행비서 이기일 서기관(미국 연수)과 김영환(金榮煥·현 국회의원) 전 과학기술부 장관의 전 수행비서 박재화 사무관(현재 국무조정실 파견근무)이 최근 공동집필한 이 수행 매뉴얼은 딱 100부만 한정 제작한 ‘대외비’ 책자이다.
‘이 책자는 공저자가 후배 비서들의 업무 수행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었으면 하는 순수한 마음에서 사비를 털어 제작한 것입니다. 책자의 내용은 대외비이니 유출하지 않기를 당부 드립니다.’(‘만점짜리 비서되기’ 중에서)
지은희 여성부 장관과 수행비서 한경희 사무관(오른쪽)사진제공=여성부
●만점짜리 비서되기
하늘 아래 비밀은 없다. 대외비는 위크엔드에 유출되고 말았다.
전직 수행비서들이 후배들을 위해 지극히 구체적으로 저술한 이 책에는 수행비서들의 일상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국무회의가 끝나면 수궁정에서 본관으로 차량을 이동한다. 차에서 내려 장관님이 계신 곳을 향해 뛴다. 그래야 장관님이 수행비서를 보고 차량이 도착했음을 감지한다.’
‘국무회의가 정부중앙청사에서 열릴 때에는 장관님을 19층 국무위원 대기실로 안내하고 1층으로 내려가 기다리면 된다. 장관님을 기다리는 장소에 대해서는 견해가 갈린다. 통설은 장관님들이 한꺼번에 두 개의 엘리베이터로 내려오므로 1층에서 기다린다는 것이고, 소수설은 19층에서 기다리다 장관님의 노트북 가방을 받아 든다는 것이다. 그러나 너무 자주 19층에서 기다리면 새가슴이니 하는 농을 들을 수도 있다.’
‘장관님이 외부 손님과 만찬할 때는 식당 카운터에 자신의 휴대전화번호를 일러두고 식사가 끝날 무렵 연락을 달라고 부탁한다. 다른 식당에서 일찌감치 식사를 끝낸 뒤 장관님이 계신 식당 주변을 서성거린다. 수행시 무엇을 먹느냐는 것은, 같은 식당에서 조금 값싼 음식을 먹는 게 통설이고, 소수설은 인근 식당에서 김치찌개나 순두부백반을 먹는 것이다.’
‘장관님이 집무실에 계실 때 불청객이 찾아오면 정중하게 대하되, 수행비서 건너편 의자에 앉아 있도록 한 후 다른 일정을 핑계로 돌려보낸다. 장관님께는 나중에 보고 드린다.’
‘장관님이 VIP행사에 참석하실 때에는 가급적 여유 시간을 만들어 이발소나 가까운 호텔 등을 이용해 머리를 다듬거나 사우나를 통해 기분을 상쾌하게 해 드리는 것이 좋다.’
‘장관님의 외부 강연이 끝나면 강의료를 받게 되는데 이것은 정당한 노동의 대가이므로 장관님께 드리면 된다.
기타 바자나 자선모금회에 참석하실 때에는 자선기금을 내야 하므로 미리 일정액의 돈을 준비해 놓는다.’
수행비서들은 늘 수많은 연락처를 휴대한다. 사진은 진대제 정보통신부 장관의 수행비서인 이진수 사무관의 전화번호수첩.사진제공=정보통신부
●남과 여
여성 수행비서를 둔 현직 장관은 이창동(李滄東) 문화관광, 한명숙(韓明淑) 환경, 지은희(池銀姬) 여성부 장관 등 3명이다.
반면 여성 장관인 강금실(康錦實) 법무부 장관과 김화중 보건복지부 장관의 수행비서는 남성이다.
강 장관의 수행비서인 유정민 사무관(32·서울대 법학과 졸업)은 “각종 행사에서 장관님 가슴에 직접 이름표나 꽃을 달아드려야 할 때는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난감하다”고 했다.
또 김 장관의 수행비서인 손호준 사무관은 “간혹 장관님이 가방을 여럿 들고 계실 때는 장관님 핸드백을 들고 여자 화장실 앞에 서 있기도 한다”고 했다.
여성 비서관들은 좀 더 꼼꼼하고 세심하다.
한 장관을 수행하는 김효정 사무관(26·연세대 행정학과 졸업)은 현직 수행비서 중 최연소. 더운 여름날 손수건을 냉장고에 얼려 차갑게 준비해 두는가하면 만일을 대비한 여분의 스타킹도 늘 휴대한다.
김 사무관이 핸드백 이외에 별도로 들고 다니는 큼지막한 서류가방 속을 들여다보니 장관이 주로 이용하는 시내 호텔 할인카드 5장, 장관 명함과 장관이 받는 인사들의 명함, 비상금 30만원, 부조금 봉투, 시내 유명 음식점 연락처 등이 빼곡히 들어 있다.
이르면 오전 6시부터 늦게는 밤 11시까지 장관의 일정을 그림자처럼 동행하고 장관 휴가 일정에 맞춰 휴가를 잡는 수행비서들은 장관의 개인사와 인간미까지 속속들이 알게 된다.
얼마 전 해외로 신혼여행을 떠난 딸에게 하루에도 몇 번씩 전화를 걸던 진대제(陳大濟) 정보통신부 장관, 정장을 사러 남성 비서관과 함께 종종 동대문 두산타워에 들르는 김화중 장관, 자신이 잘 입지 않는 옷을 가져와 여성 비서관에게 준 지은희 장관, 젊은 수행비서에게 깍듯이 ‘비서님’이란 호칭을 쓰는 강금실 장관….
‘움직이는 국가 기관’인 장관을 수행하는 비서들은 한결같이 말한다.
“해당분야의 전문가이자 대가인 장관을 흠모하고 존경합니다. 비록 업무 때문에 개인 시간은 부족하지만 전반적 국정 호흡을 현장에서 체험할 수 있는 기회는 쉽게 찾아오는 게 아니잖아요.”
▼수행 십계명▼
①비서 업무를 즐겨라
②눈과 귀가 될지언정 입이 되지는 마라
③마음을 읽어 혀처럼 움직여라
④부처(部處)의 성실한 세일즈맨이 돼라
⑤낯선 시각에서 조직을 바라보라
⑥항상 존경하고 널리 알려라
⑦잔머리보다는 큰머리를 굴려라
⑧항상 본분을 지키며 역지사지해라
⑨만능 해결사가 돼라. 모든 것이 내 책임이다
⑩하나를 더 알고 있어라. 먼저 시뮬레이션하라
(‘만점짜리 비서되기’ 중에서)
김선미기자 kimsunm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