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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이야기]폭염, 佛 버려진 자들만 덮쳤다

입력 | 2003-09-04 16:57:00

대다수 프랑스인들이 올여름 바캉스를 즐기는 동안 도심에서는 40도를 오르내리는 폭염 때문에 독거 노인들의 사망이 속출했다. AP연합


‘나는 네가 지난 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

프랑스에서는 9월 초를 ‘랑트레(Rentree·복귀)’라고 부른다. 기나긴 여름 바캉스(Vacances)를 끝내고 업무나 학업에 복귀하는 시기이기 때문. 예년 같으면 활력에 넘칠 ‘랑트레’ 분위기가 그 어느 때보다 흉흉하다. 올 여름 서유럽을 덮친 폭염으로 프랑스에서만 1만 명이 넘는 노인 사망자를 낸 뒤 책임공방과 죄의식이 번지고 있기 때문이다.

프랑스 보건부는 40℃를 오르내린 폭염으로 지난달 1∼15일 사망자 수가 지난해와 2001년 같은 기간의 평균보다 1만1435명이 많았다고 지난달 29일 발표했다. 장 프랑수아 마테이 보건부 장관은 성명을 통해 “폭염이 프랑스 사회의 가장 약한 사람들을 덮쳤다”고 밝혔다. 바캉스가 끝난 뒤 파리의 많은 아파트 정문에 바캉스 동안 유명을 달리한 거주자의 부고가 붙었을 정도.

●폭염사망이 프랑스에 많은 까닭

올 여름 폭염으로 인한 서유럽 전체 사망자 수는 2만명 이내로 추산된다. 서유럽에서도 의료시설이 좋기로 소문난 프랑스에서 과반이 넘는 사망자가 나온 이유는 뭘까.

먼저 가정에 에어컨이 없기 때문이란 분석이 나온다. 스페인 이탈리아 포르투갈 등 남부 유럽은 에어컨 덕분에 사망자가 줄었다는 것. 그러나 마찬가지로 폭염이 덮쳤던 독일 벨기에 네덜란드 등도 통상 가정에서 에어컨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들 나라의 사망자 수는 1000명 이내에 불과했다.

결국 ‘바캉스 탓’이라는 게 프랑스인들의 결론이다.

프랑스인들에게 바캉스는 알파요, 오메가다. ‘1년을 여름 바캉스를 위해 산다’ ‘바캉스 때 파리에 있는 사람은 이민자와 관광객 뿐’이라는 게 빈말이 아니다.

한 조사 결과에 따르면 특별한 사정이 생겨 바캉스를 떠나지 못하는 사람은 기르던 개나 고양이를 주변에 맡기는 등의 ‘수법’으로 바캉스를 떠난 척 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고 한다. 바캉스도 못 가는 사람이란 프랑스에선 존재가치를 상실한 인간쯤으로 치부되기 때문.

1년 동안 거동이 불편한 배우자를 정성껏 간호하던 남편이나 부인도 바캉스 때만은 배우자를 버리고(?) 바캉스를 다녀오는 경우가 많다.

●바캉스땐 정부도 ‘올스톱’

이러다보니 바캉스 때 프랑스의 정상적인 국가기능은 사실상 정지된다. 파리의 관광지를 제외한 주택가는 철시상태나 마찬가지. 평소 어디서나 살 수 있는 프랑스빵인 바게트 한 쪽, 감기약 한 봉지 사기 어렵다. 병원 의료 시스템도 제대로 돌아갈 리 없다. ‘바캉스 때 아프면 자기만 손해’라는 말이 그래서 나온다.

정부기능도 거의 ‘올 스톱’이다. 한국 같으면 정권이 흔들렸을 정도로 대규모 사망자가 발생했는데도 각료들은 대부분이 3∼4주의 휴가를 모두 마치고 파리로 돌아왔다. 자크 시라크 대통령도 휴가지에서 애도 성명 하나만 달랑 낸 뒤 3주 휴가를 끝내고 그을린 모습으로 나타났다.

이런 ‘바캉스 지상주의’가 대규모 사망의 원인을 제공했을 뿐 아니라 늑장대응으로 이어져 피해를 키웠다는 지적이다. 일간지 르피가로는 “어떻게 우리의 어른보다 바캉스를 신성시하게 됐는가?”라고 개탄했다.

그러나 정도는 다르지만 다른 서유럽인들도 한달 안팎의 여름 바캉스를 즐기기는 마찬가지다. 이 때문에 ‘가족관계 단절’이라는 프랑스 사회의 문제가 겹쳐 이번 사태를 불러왔다는 분석도 나온다.

●프랑스적 야만성

실제 폭염 사망자 대부분은 혼자 사는 노인들이었다. 질병 등으로 거동이 불편한 많은 노인이 폭염에도 아파트 베란다를 가리는 철제 셔터까지 내리고 있다가 변을 당했다.

더욱 충격적인 일은 대규모 사망자 발생 뒤에도 가족들이 찾아가지 않아 임시 안치소에 방치된 노인 시신이 400여구에 이른다는 것이다. 프랑스 언론은 이를 ‘프랑스적 야만성’이라고 비난했다.

야당과 언론은 ‘랑트레’를 맞아 폭염 사망에 대한 정부와 여당의 책임을 본격적으로 따질 기세다. 프랑스 정부는 당초 폭염 사망자 수를 1600∼3000명으로 발표, 피해규모를 줄이려 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그러나 ‘과연 그들만의 책임인가’라는 죄의식이 프랑스 사회에 퍼지고 있다. 일간지 르파리지앵은 ‘우리 모두가 죄인’이라는 제목의 기사에 이렇게 물었다. “도대체 언제부터 우리는 사랑하는 아버지와 어머니,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잊고 살아왔는가?”

파리=박제균특파원 phar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