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분석에 밝은 금융계 인사 A씨를 며칠 전 만났다. 그는 올해 경제성장률이 예상보다 더 나빠질 것 같다고 걱정했다. 기업의 투자심리와 개인의 소비심리가 좀처럼 살아나지 않는다고 진단했다. ‘하늘마저 무심하게’ 하루가 멀다 하고 내리는 비로 농업생산에 악영향이 예상된다는 말도 덧붙였다.
우리 경제의 오늘과 내일에 대한 비관론이 커지고 있다. 3·4분기(7∼9월)와 연간 성장률이 모두 2%대에 그칠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한국경제연구원은 7일 올해 성장률 전망치를 2.7%로 낮춰 잡았다. ‘성장 신화(神話)의 종언’을 알리는 경고등은 이미 켜졌다.
‘창업가 정신’이란 관점에서 보면 더 우울하다. “누가 제조업을 하겠다면 도시락 싸들고 말리겠다”는 말이 심심찮게 들린다. 이 땅을 떠나는 기업과 인재도 적지 않다. 미래의 씨앗이 현재에 숨겨져 있다는 점에서 불길한 징조다.
아무리 생각해도 2%대 성장은 너무 심하다. 정부가 2월 말 내놓은 올해 성장률 전망치는 5.5%였다. 올해 우리 경제는 오일쇼크나 외환위기 같은 메가톤급 외부 악재도 없었다. 한국경제의 기초체력이 떨어졌다지만 적어도 4%대 성장은 가능하다는 것이 일반적 분석이다. 왜 이렇게 추락했는가.
현재 우리 경제를 짓누르는 핵심적 걸림돌은 내수와 투자 부진이다. 쉽게 말해 개인이나 기업이 돈을 안 쓴다는 뜻이다.
한은은 최근 국내 65개 대기업을 대상으로 설비투자에 관한 조사를 했다. 64.4%가 올 1∼8월 설비투자 실적이 당초 계획보다 부진하다고 응답했다. 9∼12월에 예정된 투자 계획을 연기하거나 규모를 줄이겠다는 기업도 42.2%나 됐다.
개인도 마찬가지다. 가계부채와 신용불량자 급증에 따른 소비축소는 그렇다 치자. 하지만 여윳돈이 있어도 지갑을 열지 않으려는 사람이 적지 않다. 가장 큰 원인은 미래에 대한 불안이다.
‘정부 탓’을 하는 것도 이제 지쳤다. 나라경제를 위한 선의(善意)의 충고도 ‘악의(惡意)적 공격’으로 받아들이는 모습에서는 때로 절망감마저 든다.
하지만 분명히 말하자. 지금 우리 경제를 덮고 있는 ‘저성장의 늪’이라는 이 어두운 그림자의 1차적 책임은 정부에 있다. 거의 모든 여론조사에서 경제정책 실패가 노무현(盧武鉉) 정부의 최대 실정(失政)으로 꼽히고 있다.
올 2·4분기(4∼6월) 성장률은 작년 동기 대비 1.9%에 그쳤다. 게다가 직전분기 대비 성장률은 2분기 연속 마이너스였다. 필자가 만난 상당수 경제전문가는 “최소한 2%포인트는 정부가 까먹었다”고 단언했다. 현 정부가 그동안 불필요한 사회적 갈등과 마찰 키우기가 아니라 진실로 ‘경제 살리기’에 국정운용의 중심을 두었더라도 이런 ‘성적표’가 나왔을까.
지금 한국사회에서 일정수준 이상의 경제성장은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한 단계 높은 삶까지 아니라도 그나마 이뤄놓은 성과를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전제조건이다.
빌 클린턴 행정부의 경제자문위원회 위원을 지낸 미국 미시간대 레베카 블랭크 교수는 강조했다. “지속적 경제성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일자리를 얻을 기회가 없거나 임금이 계속 떨어진다면 빈곤구제정책만으로 가난한 사람을 돕는 것은 더 많은 비용을 요구할 수 있다.”
꺼져가는 성장엔진에 다시 불을 붙이는 것은 정부의 권리가 아니라 의무다. 오늘의 효용을 포기하고 위험을 감수하면서 기업 활동에 나서는 사람은 격려해야 한다. 경제를 갉아먹는 불안감도 걷어줘야 한다. ‘진보와 개혁’의 슬로건이 비효율과 빈곤, 분열로 이어진다면 그것은 이미 진보도 개혁도 아니다.
권순활 경제부차장 shkw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