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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 참회록]2부 ①'복마전' 예결위/이윤수 위원장

입력 | 2003-09-14 18:41:00

김경제기자


《‘경제는 2류, 행정은 3류, 정치는 4류.’ 한 재벌총수의 뼈아픈 지적처럼 우리 정치는 여전히 검은돈과 패거리로 상징되는 후진적 정치문화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본보는 선진국 진입의 관건인 정치개혁을 이뤄내기 위해서는 정치권의 처절한 자기반성이 전제돼야 한다는 문제의식 아래 8월 20일부터 10회에 걸쳐 연재했던 ‘정치인 참회록’의 2부로 ‘한국정치의 일그러진 자화상’을 연재하기로 했다. 본보는 이번 연재가 ‘남의 탓’ 식의 고발이나 일회적인 카타르시스를 넘어 정치인들의 육성고백을 통해 ‘우리 정치’의 문제를 드러내는 공론의 장이 되기를 기대한다.》

4조1775억원 규모의 2003년 추경예산안 심의가 한창 진행되던 올해 7월 중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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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 본관 내 한 회의실에서 열린 예결위 비공식 회의장으로 한나라당 A의원의 보좌관이 황급히 새 안경을 들고 뛰어 들어갔다. 예산안을 놓고 ‘이 사업을 넣자, 저 사업을 넣자’며 A의원과 실랑이를 벌이던 민주당 B의원이 ‘왜 합의를 번복하느냐’며 A의원의 얼굴을 치는 바람에 안경이 떨어져 알이 깨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A의원은 “이 정도는 비일비재한 일”이라며 “2000년에도 자민련의 한 의원으로부터 멱살잡이를 당한 일이 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국가의 1년 살림살이를 심의 확정하는 예결위. 그 무대 뒤편에는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13일 국회 예결위원장실에서 만난 이윤수(李允洙) 위원장은 처음에는 “동료 의원들 욕하는 것 같고, 나도 잘한 것도 없는데…”라며 손사래를 쳤다. 하지만 결국 국회의원 들이 공모해 나눠먹기로 진행돼온 예산심의의 ‘벌거벗은 현실’을 2시간여 동안 털어놓았다.

“계수조정 소위에 들어가면 지역구 사업, 도별 민원, 동료 의원 부탁, 당 지시 사업 등을 적어와 서로 따내려고 난리죠. 물론 자기 지역구 사업이 ‘1순위’입니다. 그러다 보니 정작 국가 차원에서 필요한 사업은 뒷전으로 밀리기 일쑤입니다.”

올 여름 추경안 심의 과정에서는 몇몇 의원들의 극성스러운 ‘지역구 챙기기’ 때문에 심의가 지연되기도 했다. 특히 지하철 방화 참사가 난 대구의 경우는 정부가 충분히 보상금을 지원했는데도 한 지역구 의원이 400억원을 더 반영시키자고 버텨 결국 200억원으로 타협을 이루기도 했다는 것. 이 위원장은 “당시 계수조정 과정을 공개해 기자들이 빤히 보고 있는데도 의사 진행을 방해하며 지역구 사업을 노골적으로 챙기더라”고 개탄했다.

100조원이 훨씬 넘는 본 예산을 놓고 벌어지는 각 당 예결위원들의 ‘밀고 당기기’와 ‘막후 흥정’은 더욱 가관이다.

이 위원장은 “경상도에 이만큼 줬으니 전라도에도 같은 규모만큼 나눠 줘야 할 것 아니냐는 해괴한 ‘지역 균형’ 논리가 판을 쳐온 게 정치판의 현주소”라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2002년도 예산안 심의 때의 일.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각각 계수조정 소위 위원 6명 중 4명을 영남과 호남권 의원으로 배정했다. 이 바람에 호남 쪽 숙원사업인 새만금사업과 전주신공항 사업예산을 영남지역의 각종 민원성 사업예산과 양 지역 의원들이 서로 바터형식으로 흥정해 나눠먹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이 위원장은 “정부안 중 보통 4000억∼5000억원의 삭감 대상 예산을 찾으면 이 중 절반은 계수조정 소위 위원 등의 지역구 사업예산에 반영되고, 나머지 절반만 형식적으로 삭감하는 게 관례다. 서로 싸우다 막판에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식의 담합을 하게 된다”고 했다.

국회는 117조5000억원의 2004년도 예산안 심의를 앞두고 있다. 이 위원장은 “벌써 예결위원 중에 ‘계수조정 소위에 안 넣어주면 가만히 안 있겠다’고 반(半) 협박조로 나오는 사람이 있다. 또 각종 민원과 청탁 때문에 ‘미칠’ 지경이다”고 하소연을 했다.

“이 서랍 안을 보세요. 전부 동료 의원이나 자치단체장의 민원서류입니다. 나도 옛날에는 ‘이것 안 들어주면 너하고 말도 안한다’고 협박하고, 끝내 안 먹히면 욕을 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막상 위원장 되니까 청탁 때문에 정신을 못 차리겠더군요. 사실 나도 과거에는 내 지역이나 우리 당 역점 사업 챙기는 게 우선이었습니다. 그러나 과거는 과거고, 내가 욕먹더라도 고칠 것은 고쳐야 한다고 생각해요. 일부 의원들의 경우는 지역구 몇 십억 챙기는 데는 눈에 핏발을 세우면서도 몇 푼 안 되는 장애인이나 사회단체 사업 예산은 팍팍 잘라 내기 일쑤지요.”

이 위원장은 마지막으로 “특정지역이나 지역구사업에 대한 예산 편성을 요구하며 심의를 지연하고 떼를 쓰는 위원들이 있으면 명단을 언론에 다 공개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그는 “의원 자신들의 ‘발상의 전환’이 없이는 어떤 제도를 도입해도 결국 백년하청(百年河淸)일 수밖에 없다”고 씁쓸히 말했다.

정용관기자 yongari@donga.com

▼이윤수 위원장은…▼

6대 국회 때 당시 김대중(金大中) 의원의 경호비서로 정치에 입문한 3선 의원(65세). 네 번째 도전 끝에 14대 때 첫 금배지를 달았다. 주로 국회 건설교통위에서 활동했으며 여러 차례 국정감사 스타에 뽑히기도 했다. 범(汎)동교동계로 분류되나 직설적인 성격 때문에 ‘입바른 소리’를 자주해 DJ 정권 내내 비주류에 머물렀다. 올 7월 초 당내 주류측 일부 의원의 반대로 우여곡절을 겪었으나 결국 16대 국회 마지막 예결위원장을 맡았다. 지난 대선 때 후보단일화를 주장하며 민주당을 탈당했다가 복당했다. 현재 민주당 사수파의 핵심 멤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