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마산에 엄청난 태풍피해 “제가 할일 없을까요”
“남의 일 같지 않아요. 어려움을 겪고 있는 분들을 위해 제가 뭔가 할 일은 없을까요?”
추석을 맞아 경남 마산의 집에 내려간 정선민(29·신세계)은 요 며칠 안부전화를 받느라 정신이 없었다. 한반도를 강타한 제14호 태풍 ‘매미’가 그의 고향땅에도 엄청난 인명과 재산 피해를 입혔기 때문.
“다시 시작할래요.” 미국여자프로농구에서 4개월만에 국내 무대에 복귀한 정선민이 밝은 표정으로 앞으로의 포부를 밝히고 있다. 강병기기자
“저희 집은 해안가에서 멀리 떨어진 고지대에 있어 다행히 괜찮았는데 수몰 현장 바로 인근에 외갓집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모두 돌아가셨지만 얼마 전까지도 제가 자주 들러 놀던 곳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다니요….”
태풍이 지나간 14일 정선민은 모처럼 외출해 외가가 있는 곳에 가보려 했지만 차마 용기가 나지 않아 발길을 돌렸다.
“가족을 잃은 분에, 집을 잃은 분에, 안타까운 사연이 너무 많아요. 그래도 다들 힘 내셨으면 좋겠네요. 저도 그래야겠죠….”
아픈 만큼 성숙해졌을까. 마음속에 혹시 상처가 남아있지 않을까하는 추측은 정선민 특유의 자신 있는 목소리에 보기 좋게 빗나가 버렸다. “나쁜 기억은 모두 미국에 두고 왔습니다. 제 머리 속에는 새 출발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만 넣어뒀어요.”
한국농구 사상 첫 미국여자프로농구(WNBA) 진출선수 정선민. 지난 4월 WNBA 신인 드래프트에서 1라운드 8순위로 시애틀 스톰의 지명을 받은 뒤 부푼 기대 속에 미국 무대에 올랐지만 현실은 냉혹하기만 했다.
팀이 치른 34경기 가운데 절반인 17경기에서 선발이 아닌 식스맨으로 겨우 코트에 나섰다. 경기당 평균 6.9분을 뛰며 1.8점에 0.6리바운드. 미국에서 한 시즌을 통틀어 넣은 30점은 한국에선 한 경기에도 너끈히 올렸던 점수가 아니던가. 한국농구를 주름잡은 그로서는 결코 받아들이기 힘든 성적표였다.
“선수라면 누구나 오래 뛰고싶은 것 아닙니까. 뭔가 해볼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자 자존심이 상했습니다.”
○“숙소에서 채팅하며 미국생활 외로움 달랬죠”
정선민은 한국농구와는 사뭇 다른 미국농구에 적응하느라 고전했다. 특히 공격보다는 철저한 수비 위주의 농구로 변신하는 게 부담스러웠다. “솔직히 부족한 부분이 많았어요. 포지션에 따른 확실한 역할 분담이 중요했는데 제 위치가 어정쩡했거든요.”
게다가 팀 내에서 유일하게 한국어로 대화할 수 있었던 재미교포 통역이 시즌 중반 그만두면서 혼자 모든 일을 처리해야 했고 마음 터놓을 만한 말벗도 없었다. 숙소에서 인터넷 채팅과 전화 통화로 외로움을 달래며 눈물을 쏟았다.
그래도 미국에서 보낸 시간이 허송세월은 결코 아니었다. “훈련할 때만큼은 철저하더군요. 최고의 선수들과 부딪치면서 개인기도 배웠고 철저한 자기관리도 인상적이었습니다.” 결과 보다는 과정을 중시하는 풍토 속에 늘 경기장을 가득 메우는 팬들의 수준 높은 관전 문화와 권위 있는 심판은 부러웠다는 게 정선민의 얘기.
“잘됐건 못됐건 도전 자체가 의미 있었다고 봅니다. 쉽지는 않았지만 개척하는 자세로 뭔가를 배우려 했던 데 만족합니다.
지난달 말 시애틀 스톰이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하자 귀국한 정선민은 신세계에 복귀해 곧바로 여자프로농구 여름리그 플레이오프 우리은행과의 경기에 출전했다. 하지만 신세계는 2연패로 챔피언결정전 문턱에서 주저앉았다. “오히려 잘 하고 있던 동료들이 나 때문에 위축된 것 같아 미안함이 앞서요.”
시애틀 스톰과 3년 계약한 정선민은 내년 시즌 WNBA 복귀에 대해선 ‘물음표’를 내던졌다. “국내 겨울리그가 1월부터 4월말까지 열리고 그 다음엔 아테네올림픽 출전 문제가 걸려 있어 어렵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정선민에겐 올 연말 재계약 문제가 걸려있다. 이번 여름리그를 끝으로 자유계약선수로 풀리게 되는 것. “한 팀에서 오래 뛰는 것도 의미가 있겠지만 선수들이 활발하게 팀을 이동한다면 여자농구 활성화에도 도움이 될 겁니다. 무엇보다도 우승할 수 있는 팀에 있고 싶습니다. 나 혼자 하는 농구가 아니라 선수 모두가 팀워크를 맞춰가는 게 중요합니다.” 우선 협상 대상인 신세계와 재계약할 수도 있겠지만 다른 팀 이적의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겠다는 뜻.
○“결혼이요? 연인은 있지만 2, 3년 더 뛴 다음에…”
타향에서 외로운 나날을 보냈던 정선민은 이번 한가위 연휴 동안 모처럼 가족 친지와 단란한 시간을 보냈다. 그러면서 귀가 따갑도록 들은 말이 있단다. “이제 서른인데…. 국수는 언제나….”
내년이면 만으로 30세. 세살 위의 항공사 승무원과 편하게 만나고 있는 정선민. 진지하게 앞날을 얘기해 본 적은 없지만 우리은행과의 플레이오프 춘천 경기에 응원을 올 정도로 가깝다.
“현실적으로 운동과 결혼 생활을 함께 하기는 힘들 것 같아요. 젊은 편도 아니니 빨리 아기도 가져야 하는데…. 2,3년 정도 열심히 뛴 뒤 후배들을 위해 길을 열어줘야죠. 그 때까지는 ‘역시 정선민’이라는 얘기가 나오도록 이 악물 겁니다. 지켜봐 주세요.”
그동안 온갖 역경 속에서도 최고의 자리를 지켜온 정선민의 한마디가 또다시 예사롭지 않게 들린다.
■정선민에 대해 알고싶은 몇가지
△생년월일〓74년 10월12일 △신장〓1m85, 76kg
△가족관계〓정명윤씨(57)와 고미경씨(54)의 1남1녀 중 장녀. 남동생은 남자프로농구 KCC 정훈종(2m5)
△경력=마산산호초-마산여중-마산여고-SKC-신세계-미국여자프로농구(WKBL) 시애틀 스톰 △좌우명=내 운명은 스스로 개척한다
△혈액형〓B형 △종교=천주교 △e메일〓coolcatmean@hotmail.com
△주량=소주 1병, 맥주 2병 △즐겨듣는 노래〓 Missing You(플라이 투 더 스카이)
△좋아하는 음료=다이어트 콜라 △좋아하는 색깔=분홍
△수상경력=93∼94농구대잔치 신인상, 95∼96농구대잔치 MVP, 99WKBL 겨울리그 MVP, 2000WKBL 여름리그 MVP, 2001WKBL 여름리그 MVP, 2002WKBL 겨울리그 MVP
김종석기자 kjs0123@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