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물어 고개 숙인 벼, 잘 익고 살진 과일을 기다리던 농심(農心)이 슬픔에 잠겼다.
어디 농민뿐이랴. 학교 문을 나서도 갈 곳이 없는 2030 실업자, 사교육비 고통 끝에 다 큰 자식의 무직 방황을 지켜봐야 하는 부모, ‘사오정 오륙도’의 퇴출 불안에 떠는 중장년, 신용에 빨간 줄 치고만 330만명의 빚 죄인, 한 해 수십만명의 문 닫는 영세 자영업자, 무너지는 중산층과 부풀어 오르는 빈곤층….
▼뭘 믿고 잘 풀릴 거라 하나 ▼
소득 2만달러 앞으로! 그 진군나팔 소리를 들으며 마이너스로 쪼그라든 실질국민소득 발표도 함께 듣는 귀가 멍멍하다. 해마다 7% 성장에 일자리 50만개를 만들겠다던 노무현 후보의 대선공약이 아스라하다.
일부 노조는 일 덜하고 돈 더 받고, 싫은 일 안 하고 일자리는 지키기 위해 파업한다. 국민 다수는 기업 직장에 목을 매면서도 반(反)기업 정서를 즐긴다. 정부 사람들은 여전히 기업을 다스려야 할 존재로 여긴다. ‘기업하기 좋은 나라, 투자하고 싶은 나라’는 아일랜드지 한국이 아니다. 공장이 모텔보다 천덕꾸러기다.
기업들은 넌더리를 낸다. 돈이 있는 제조업체도 해외투자는 해도 국내투자는 두렵고 지겹다고 한다. 중소기업이 대기업보다 더 많이 설비를 해외로 옮긴다. 지방경제가 안 흔들리면 이상하다. 4년 전 71억달러를 웃돌았던 외국인의 국내 제조업 투자는 작년 24억달러로 추락했고 올해는 더 안 온다. 있던 것도 떠난다. 시중에 500조원이 깔렸다지만 생산에 투자되지도, 일자리를 만들지도 않고 쉽게 뻥튀기할 곳을 찾아다닌다. 부동산투기 광풍이 이를 말해준다.
제조업이 공동화(空洞化)되는데 무슨 재주로 동북아 물류허브, 금융중심을 만들겠다는 건지 잠꼬대로 들린다. 부산은 이미 중국 상하이(上海)와 선전(深(수,천))에 밀렸다.
이 나라에 미래가 있나, 다 싫다, 이민이나 가야겠다는 행렬이 자꾸 길어진다. 고급인력도 나가기만 하고 안 돌아온다. 두뇌 유출로 국가경쟁력이 떨어지는 정도가 주요 30개국 가운데 8번째로 심하다.
쭉정이, 썩은 열매가 들녘에만 널린 게 아니다. 나라 경제가 쭉정이 꼴이다. 그나마 수출이 활로라지만 새 기술 새 설비에 투자의 씨가 뿌려지지 않고 새로운 인적 경쟁력이 배양되지 않는데 몇 년이나 버틸까.
경제의 병을 현 정부가 다 만든 것은 물론 아니다. 하지만 이 정부 들어 문제가 더 커졌다. 이제는 투자해도 되겠구나 하는 공감이 생길 만큼 기업환경을 개선하고 노사관계를 안정시키지 못했다. 다수의 노동 약자들이 더 많은 기회를 나누어 가질 수 있도록 소수의 노동 강자들을 견제하지 못했다. 일관성 없는 정책 발언으로 시장의 시계(視界)를 더욱 흐리게 했다. 경제정책의 신뢰를 잃은 것이 가장 큰 잘못이다.
노 대통령은 “정말 경제대통령 한번 하고 싶다”고 했다. 정말 경제대통령 한번 나왔으면 좋겠다. 야당도, 다른 반노(反盧)그룹도 경제문제 가지고 대통령의 발목을 잡아서는 안 된다.
경제대통령이 되려면 우선 이 나라가 먹고 살 것을 만드는 정책에 집중해야 한다. 현실적인 단기정책과 이상적인 장기정책이 따로 있는 것처럼 구분하고 정책추진 주체들의 역할을 이원화하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그러한 이중적 발상은 대통령과 그 코드그룹의 묘한 이념적 의식구조를 반영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게 이 나라 경제를 살리는 데 도움이 될까. 오히려 이도 저도 아닌 ‘비빔밥 정책’으로 신호체계를 계속 혼란케 할 우려가 더 크다. 5년 내내 왼쪽 한번, 오른쪽 한번 식으로 비틀거려서는 경제를 못 살린다.
▼경제 일으킨 지도자를 보라 ▼
경제를 일으킨 아시아 국가의 지도자는, 리콴유도 덩샤오핑도 이념의 도그마를 깬 실용주의자였다. 지금 노 대통령의 경쟁상대인 후진타오는 더욱 그렇다. 후진타오 어록에 이런 게 있다. ‘실질적인 것을 추구하고, 실질적인 것에 힘을 쏟고, 실효성을 따지겠다(求實, 務實, 講究實效).’ 그는 또 사상으로부터 해방된 시장경제를 일찌감치 강조했다.
마오쩌둥이 한국의 초기 고도성장을 결정적으로 도왔다는 말이 있다. 그가 문화혁명의 피바람을 일으키며 중국을 이념의 포로로 삼고 있을 동안 세계시장에서 한국의 기회가 커졌다는 얘기다. 노 정권이 이념코드의 사슬을 벗어던지지 못한다면 이번에는 어떤 나라들이 웃을까.
배인준 수석논설위원 injo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