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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 2030]청년실업의 그늘…'20代 백수' 33만명

입력 | 2003-09-16 18:03:00


2001년 8월 서울 지역 중위권 대학 공대를 졸업한 이모씨(30). 취업 준비생인 이씨는 요즘 자신도 모르게 왼쪽 손목을 보는 일이 늘어났다. 대학 졸업 6개월 전부터 지금까지 200여 곳에 입사지원서를 냈지만 모두 퇴짜를 맞은 이후 생긴 버릇이다.

“할 말은 아니지만 ‘백수 생활’을 2년 이상 하면서 자살 충동을 자주 느꼈습니다. 편찮으신 부모님을 위해서라도 취직을 해야 하지만 받아주는 곳이 없어요. 회사를 고르는 것도 아닌데….”

고용 시장에 경기 침체 한파가 몰아치면서 사상 최악의 ‘청년실업’ 사태가 빚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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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계청에 따르면 올 7월말 현재 20∼29세 실업자는 32만9000명으로 지난해 같은 달(28만1000명)보다 17.1%나 늘었다. 이에 따라 20대 실업률은 작년 7월 5.8%에서 1년 사이에 6.9%로 1.1%포인트 높아졌다.

여기에다 많은 기업이 학교를 갓 졸업한 신규 인력보다는 경력직 채용을 선호하면서 청년층 실업을 부채질하고 있다. 한국노동연구원에 따르면 신규 직원과 경력 직원 채용 비율이 1996년에는 65.2 대 34.8이었지만 지난해에는 18.2 대 81.8로 완전히 역전됐다.

▽왜 취업이 안 되나=정부는 당초 올해 경제성장률을 5%대로 예상했다. 하지만 내수 및 투자 위축 장기화와 잇따른 노사분규, 추석 연휴 기간 중 남부지방을 강타한 태풍 ‘매미’ 등 악재가 겹치면서 성장률 전망치는 계속 추락하고 있다.

LG경제연구원 김기승(金基承) 연구위원은 “고용유발계수를 이용해 계산했을 때 경제성장률이 1%포인트 떨어지면 실업자가 7만∼10만명 정도 늘어난다”며 “연간 경제성장률이 2%대로 하락하면 최대 30만개 정도의 일자리가 없어지는 셈”이라고 말했다.

채용정보업체인 잡코리아가 국내 대기업 111개사를 대상으로 실시한 ‘2003년 하반기 대기업 채용 전망’에 따르면 44개 기업(39.3%)이 지난해보다 채용 규모를 축소할 계획으로 나타났다.

또 조사 대상 기업 중 34개사(30.4%)는 하반기 채용 계획과 일정을 확정하지 않았거나 아예 계획 자체를 세우지 않은 것으로 조사됐다.

▽눈높이를 못 맞추는 것도 원인=지난해 초 지방의 한 국립대 경제학부를 졸업한 안모씨(29)는 그동안 명함을 4번 만들었다. 졸업과 동시에 방직회사에 입사해 2개월가량 다녔지만 연봉(1800만원)이 적고 ‘약속이 있어도 회사일이 먼저’라는 식의 회사 분위기가 못마땅해 사표를 던졌다.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에도 1년 계약직으로 들어갔지만 정규직과의 차별 때문에 6개월 만에 나왔다.

“이렇게 들락거린 회사가 4개 정도 됩니다. 주변에서 생산직은 오히려 ‘구인(求人) 대란’이라며 취업을 권유하지만 대학까지 나온 마당에 단순한 일을 하면서 인생을 낭비할 생각은 없습니다.”

간판을 추구하는 구직자들의 심리도 청년 실업 증가의 또 다른 요인이다.

헤드헌터 업체인 유앤파트너즈 유순신(劉純信) 사장은 “사람을 못 구해서 쩔쩔매는 기업도 많지만 구직자들이 눈길을 주지 않고 있다”며 “많은 젊은이가 외국계 기업이나 이름만 들어도 알아주는 대기업에서만 일하기를 원하기 때문에 구직(求職)과 구인이 연결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국가적 위기 초래 가능성도=전문가들은 청년 실업이 정치, 사회, 경제적 불안을 고조시켜 국가적 위기를 불러올 우려가 크다고 지적하고 있다.

새뮤얼 헌팅턴은 베스트셀러인 ‘문명의 충돌’에서 “역사적으로 청년실업자들이 창궐할 때 사회변혁 등 혁명의 기운이 싹텄다”고 분석했다. 청년집단이 인구 분포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높은데 그들의 역할이 소외되는 현상이 장기화되면 파시즘으로 대표되는 극단적인 민족주의 운동으로 변질된다는 것.

청년 실업 문제가 국가경쟁력 저하로 이어진다는 시각도 있다.

한국노동연구원 이병희(李炳熙) 연구위원은 “기업들이 청년층을 새로 채용하지 않으면 기존 인력들이 갖고 있는 생산 및 관리 노하우 명맥이 끊겨 장기적으로 회사 경쟁력뿐 아니라 국가경쟁력까지 떨어뜨릴 가능성도 있다”며 “기업들이 일자리를 많이 만들어내는 방향으로 국가 역량을 집중시켜야 한다”고 지적했다.

특별취재팀

▼직업선택 기준 1순위는 '안정성'▼

경남 마산시에 사는 정순주씨(가명·29)는 올해 추석 직후 학습지 교사직을 그만두고 인근 김해시 장유택지개발지구에 있는 부동산 중개업소에 취직했다.

대학을 졸업한 미혼 여성이 선뜻 부동산 공인중개사를 택한 건 결혼과 평생직장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한 것.

“공인중개사보다는 학습지 교사가 더 ‘어울린다’는 의견도 많았어요. 하지만 학습지 교사를 평생 할 수 없는데다 여자도 안정적인 직업을 가져야 한다고 요구하는 남자들이 많아요. 부동산 중개업을 선택한 이유도 이 때문입니다.”

정씨는 지난해 공인중개사 자격증을 따놓은 덕에 중개업소에서 실무를 익히면 바로 개업한다는 계획이다. 장유지구는 아파트 입주가 한창이기 때문에 학습지 교사 월급의 두 세배는 벌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청년 실업이 장기화하면서 젊은층 선호도가 낮았던 직종이 인기를 끌고 있다. 인기의 비결은 ‘안정성’과 ‘적당한 수입’.

전국부동산중개업협회가 서울지역 중개업소 주인들의 연령을 분석한 결과 작년 4월 현재 30세 이하 회원은 143명이었지만 올해 4월은 343명으로 1년 새 2.4배로 늘었다. 31∼40세 회원도 1168명에서 2319명으로 2배로 증가했다. 반면 같은 기간 40대는 1.5배, 50대는 1.2배, 60대는 1.1배 늘어나는 데 그쳤다.

공무원도 인기직종이다. 7일 실시된 41회 공무원 7급 공채시험에는 614명 모집에 6만991명이 지원해 역대 최고인 99 대 1의 경쟁률을 기록했다. 지난해 경쟁률은 88 대 1이었다.

5월 치러진 9급 공채시험(1936명)에도 11만6590명이 응시해 작년 10만5286명보다 1만여명이 많았다. 5급 행정고시(210명 모집)에도 1만813명이 몰려 지난해 9034명을 웃돌았다.

목숨을 걸고 화재 현장에 투입되는 소방공무원 임용시험에는 여성들까지 대거 몰리고 있다.

서울시 소방방재본부에 따르면 올해 지방소방공무원 임용시험 소방분야 최종 합격자 80여명 중 여성이 10명으로 12.5%를 차지했다. 여성 합격자의 대학 전공분야도 건축학 토목학 아동학 비서학 등 다양하다.

남자만 뽑다 남녀응시 구분을 없앤 첫해인 2000년에는 선발인원 50명 가운데 여성이 단 1명에 불과했다.

전체 지원자 수에서도 여성이 큰 폭으로 늘어나는 추세다. 2000년에는 664명 중 여성이 22명(3.3%), 2002년에는 2530명 중 143명(5.7%)에 불과했지만 실업난이 가중된 올해는 1576명 중 358명(22.7%)으로 급증했다.

▼고소득-3D업종 양극화 해소할 고용대책 필요▼

실업의 원인은 일차적으로 경기 침체다. 문제는 앞으로 경기가 회복돼도 고용이 그만큼 탄력적으로 늘어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경제구조의 변화에 따라 일자리의 성격과 분포도 달라지고 있다. 고도의 숙련된 기술을 요구하는 고소득 고직종과 3D 성격이 강한 단순 직종으로 양극화 현상이 진행되고 있다. 경력이 없는 대졸자들이 이 틈새에 빠져 적당한 일자리를 못 찾는 것이다. 중간에서 ‘허리’ 역할을 해줄 중견기업들도 고용 창출을 못하고 있다.

소위 ‘복지병’으로 부를 수 있는 젊은이들의 태도도 문제다. 먹고살 만하니까 어렵고 힘든 일,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 일은 하지 않으려고 한다. 상당수가 ‘눈높이’를 낮추지 못한다. 경기 안산시에서 공구 회사를 하는 한 지인(知人)은 “서울의 4년제 대학 상경계열을 졸업한 20대를 한 번 채용해 보는 게 소원”이라고 푸념했다.

청년 실업은 국가의 인적자원이 빠르게 상실된다는 측면에서 문제다. 졸업 후 2, 3년만 지나도 배운 내용을 잊어버리는 등 ‘감가상각’이 진행되는 속도가 50대에 비해 많이 빠르다. 결국 경제의 성장 잠재력이 저하된다.

선진국의 경우 비슷한 현상을 이미 경험했지만 그 시기는 1인당 국민소득이 2만달러에 가까워진 시점이었다. 한국은 1만달러 수준에서 너무 빨리 찾아왔다. 한탕주의가 퍼지면서 불로소득 기회에 대한 기대감이 너무 높아진 탓도 있다.

여성인력의 사회 참여 활성화가 한 가지 대안이 될 수 있다. 가사와 일을 병행해야 하는 여성은 비정규직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경우가 많아 상대적으로 진입과 퇴출이 쉽다. 고용의 유연성이 높은 이들을 활용하면 실업으로 인한 경쟁력 저하를 막을 수 있다.

김종석 홍익대 경제학과 교수

▼특별취재팀▼

▽팀장=권순활 경제부 차장

▽팀원=임규진 차장급기자

송진흡 고기정 이정은 김광현 박중현 신석호

최호원 박용기자(경제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