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미옥기자
김기덕 감독(43·사진)에게 리얼리즘을 요구하기란 애초부터 불가능한지 모른다. ‘파란 대문’ ‘악어’ ‘섬’ ‘나쁜 남자’ 등에서 독특한 화면미학을 보여준 그의 영화적 언어는 ‘충동’과 ‘과잉’이다. 가학과 피학의 에너지는 현실의 임계수치를 넘쳐흐른다.
그런데 19일 개봉하는 김 감독의 아홉 번째 영화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은 너무 조용하고 평화롭다. 성폭행도 살인도 없다. 김 감독이 지난 7년 간 정력적으로 만든 8편의 영화와 비교할 때 이 영화는 세 가지 기록을 세웠다. 첫째, 졸릴 수 있다(김 감독의 표현). 둘째, 고등학생도 공식적으로 볼 수 있다(15세 이상 관람 가). 셋째, 감독이 주연으로 출연했다(출연료 200만원).
그는 과연 ‘착해진’ 걸까. 김 감독은 “이젠 영화를 통해 너무 화내고 짜증내선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사람들이 나를 불쾌하고 재수 없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 내 운명인가 보다’ 하는 심정으로 만들었다”고 알쏭달쏭하게 말했다.
이 영화 속 ‘구도’(求道)는 또 다른 욕망의 배설인 것처럼 보인다. 주인공이 맷돌을 매달고 산자락을 오르는 모습도 여전히 센세이셔널하다. 전작들에 비해 영화적 무드는 정적(靜的)으로 급반전됐지만, 영화 속 상징 코드는 그대로 꿈틀거린다. 이 영화의 숨은 상징들을 풀어본다.
▽절=주요한 배경인 절은 강 한가운데에 떠 있다. 김 감독은 고립된 공간에서 꿈틀거리는 동물적 욕망을 들여다보기를 시도한다. 영화 ‘섬’에선 강 위로 부유하는 방갈로에서 끔찍한 사랑행각이 벌어졌었다. 이 영화에선 사찰 법당 내부 절구통 물 한가운데에 외롭게 앉아 있는 돌부처는 강물 한가운데 고립된 절의 모습을 닮아 있다. (그래픽·무게 30t의 암자는 3억5000만원을 들여 경북 청송군 주왕산국립공원 안 연못에 바지선을 띄워 제작했다.) 남자를 고립시키는 물은 그래서 욕망의 액체다.
▽문=3개의 상징적 문이 있다. 물 위에 떠 있는 대문과 법당 내부에 서 있는 두 개의 문(그래픽). 벽 없이 덩그러니 서있는 문들은 ‘이미지의 문’이다. 문을 통과하는 행위는 인간의 기본적 예의를 지키는 것을 뜻한다. 문을 지나지 않는 것은 예의를 어기는 행위다. 청년승은 여자와 성관계를 가질 때 평소 드나들던 문을 통과하지 않고 여자에게 접근한다. 반면 여자는 문을 경유해 남자와 만나는 동선(動線)을 보인다. (그래픽) 김 감독은 “문을 벗어나는 행위가 ‘그럴 수도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길 원한다. 도덕적 삶만이 인간적인 건 아니다”고 말했다.
▽고양이=동물은 욕망 분출의 대상이다. 영화 ‘섬’에서 붕어는 난도질당하거나 회로 뜨인 뒤 숨만 붙은 채 강에 버려진다. 반면 이 영화에서 동물은 학대의 대상이 아닌 깨달음의 도구다. 노승은 고양이 꼬리에 먹물을 묻혀 반야심경을 쓴다(사진).
▽자살=주인공은 ‘폐’(閉·막히다)자를 쓴 종이로 눈 코 입 귀를 막는 상징적 행동과 함께 스스로 숨을 참고 자살을 기도한다. 노승은 이 방법으로 성불한다. 김 감독은 “일본군에게 잡힌 독립군들이 사용한 ‘호흡 중단법’에서 이 장면을 착안했다”고 말했다. 영화 ‘악어’에서도 남자는 물속에서 여자의 시체와 키스(숨 쉬지 않고 자살하려는 것)한다.
이승재기자 sjda@donga.com
●줄거리는…
사계절을 배경으로 동자승이 성장할 때까지의 구도과정을 담은 작품.이 영화의 북미 지역 배급권은 ‘와호장룡’의 배급을 맡았던 미국의 소니 픽처스 클래식에 팔렸다. 동자승은 개구리와 뱀, 물고기에게 돌을 매달아 괴롭힌다. 이를 지켜본 노승은 잠든 아이의 등에 돌을 묶고 “너는 평생 그 돌을 마음에 지고 살 것”이라고 말한다. 아이는 청년이 되고 요양 온 여학생과 성관계를 갖는다. 여학생이 떠난 뒤 집착을 못 이긴 청년은 절을 떠나고, 배신한 아내를 죽인 살인범이 되어 절로 도망쳐온다.
▼감독의 속마음은…▼
Q: 물에 떠있는 절을 어떻게 생각했나
A: 앵글 잡으면 폼 나니까. 영화 보다가 멀미나면 움직이는 절 때문인 줄 알라.
Q: 성폭행 장면이 없어 덜 비난받겠다.
A: '요번엔 여자가 죽는다'는 기발한 비난도 있더라.
Q: 15세 이상관람가 등급을 처음 받았다.
A: 관객이 1000명은 더 늘 것이다.
Q:'겨울'편에 직접 출연했다. 안성기나 김용옥을 섭외하려 했다는데.
A: 안 선배는 스케줄이 안 맞았고 김용옥씨는 연락이 닿지 않아 그만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