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요청 내용이 구체적으로 공개되면서 이라크 파병 문제의 성격은 크게 달라졌다. 이제는 파병 여부뿐만 아니라 파병 규모 등 조건까지 냉철하게 따져 적절하게 대응해야 할 상황이다.
적어도 3000명이 될 것으로 보이는 ‘폴란드형 사단’ 규모의 파병은 한미 두 나라가 동맹국 사이라고 하지만 선뜻 수용하기에는 부담스러운 ‘뜻밖의 요청’이다. 우리 군이 특정지역을 통제하며 독자적으로 작전수행을 하게 된다면 이라크 국민으로부터 미군의 ‘점령지 통치’에 가담한다는 반감을 살 우려도 있다. 미국이 원하는 규모의 병력을 1년간 파견할 경우 500억원 이상이 될 것으로 예상되는 경비도 무거운 부담이다.
국군을 외국에 파병하는 문제인 데다가 조건 또한 만만치 않다. 파병 여부에 따라 한미관계가 크게 달라질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정부가 주도적으로 처리해야 할 사안이지 결코 여론의 흐름에서 가닥을 잡을 대상은 아니다. 정부가 국익차원에서 파병의 명분과 조건을 판단해 결단을 내려야 한다.
이미 여러 시민단체들이 파병반대를 선언하고 대규모 시위를 예고했다. 정부는 사실무근이라고 부인하지만 일부에서는 우리가 파병을 하지 않으면 주한미군을 이동 배치 한다는 설까지 제기돼 혼란이 가중되고 있다.
정부에는 주권(主權)이라는 잣대가 있다. 미국도 ‘파병 여부는 한국의 주권적 사항’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미국의 요청이 무리하다고 판단되면 거부하는 것이 옳다. 미국의 요구에 대해 수정 제안을 하거나 유엔 결의 등의 전제조건을 제시하는 것도 주권국의 당연한 권리다. 이라크 파병은 무엇보다 미국을 돕는 일인데 끌려 다닌다는 인상을 주면서 미국의 요청에 응한다면 국민의 지지를 받기 어렵다.
판단과 결정은 물론 노무현 대통령이 주도해야 한다. 파병을 선택할 경우 국민을 설득할 최종적인 책임 역시 노 대통령에게 있다. 지금이야말로 노 대통령이 리더십을 발휘해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