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증권거래소(NYSE)에 주식을 상장하면 증시 거래 시작종을 울리는 행사에 참여한다. 오전 9시반의 행사 모습은 TV로 중계된다. 증시 첫 시세가 어떻게 뜨는가를 주의 깊게 바라보는 투자자들은 이 장면을 보게 된다.
이때 꼭 보게 되는 얼굴이 리처드 그라소 NYSE 회장이다. ‘9·11테러’로 뉴욕증시가 문을 닫았다가 일주일 만에 거래를 재개할 때 단호한 모습으로 거래종을 울려 테러에 굴복하지 않는 상징으로 떠올랐던 사람이기도 하다.
16일 신한금융지주회사가 주식을 NYSE에 상장했다. 신한지주 최영휘 사장은 “전날까지만 해도 그라소 회장을 만날 수 있을지 불확실했으나 그는 16일 오전 프로답게 꿋꿋하게 모습을 드러냈다”고 전했다. 최 사장은 “그라소 회장이 새 고객을 따뜻하게 환영하고 우리가 잘 알아듣을 수 있도록 천천히 또박또박 발음하는 태도가 인상적이었다”고 평가했다.
그라소 회장의 업무수행을 걱정할 정도가 된 것은 돈 때문이다.
그가 지난달 퇴직급여 1억3950만달러(약 1600억원)를 일시불로 받았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회장 재직 8년 동안 얼마를 어떤 명목으로 받았는지가 최근 월가의 관심사가 되고 있다. “농구 심판이 농구선수처럼 고액 연봉을 받을 수는 없는 것 아니냐.” NYSE에 상장된 대기업의 최고경영진이 억대 연봉을 받는 것을 흉내 내 그라소 회장이 거액 연봉을 받았다면서 비판하는 소리다.
비난은 사임 압력으로 확대돼 가고 있다. NYSE 회장 출신인 윌리엄 도널드슨 미 증권거래위원회(SEC) 위원장의 조사 지시에 이어 미국 최대 연기금인 캘리포니아공무원퇴직연금 등이 그라소 회장의 사임을 촉구했다.
상장기업의 재무구조나 지배구조를 건전하게 하도록 감시하는 역할을 해야 하는 NYSE가 회장에게 돈을 퍼부어 주는 것을 보니 NYSE를 믿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이탈리아계인 그라소 회장을 몰아내기 위한 월가 유대계의 거세작전이라는 분석도 있다. 어쨌든 그라소 회장은 시간이 갈수록 궁지에 몰리는 인상이다. 18일 뉴욕에 상륙한다는 허리케인 이사벨만큼이나 강한 바람을 그가 견뎌낼 수 있을까.
뉴욕증시의 투자심리는 나쁘지 않지만 일각에선 또 한번의 하락장을 우려한다. 이 경우 1931년 대공황 이후 처음으로 4년 연속 하락이라는 기록을 세우게 된다.
뉴욕=홍권희특파원 konih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