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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 2030]속출하는 신용불량…빚 무서운줄 몰라

입력 | 2003-09-17 18:07:00


“돈을 벌어도 빚을 갚을 생각은 없어요. 세금 안 내고 떵떵거리며 사는 사람도 많잖아요. 은행이나 카드회사를 따돌리는 방법도 알고 있는데 뭐 하러 빚을 갚나요.”

한 인터넷 포털사이트에서 회원 4만여명의 ‘명품 동호회’를 운영하고 있는 박모씨(26). 3년 전부터 신용카드를 사용해 수십만∼수백만원짜리 해외 유명 패션상품을 사 모았던 그는 지난해 신용불량자 리스트에 올랐지만 전혀 개의치 않는다.

20, 30대 청년층 신용불량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가운데 박씨처럼 ‘도덕적 해이(모럴 해저드)’에 빠져드는 사례도 급증하고 있다.

▼연재물 목록▼

- 청년실업의 그늘
- 해외로…해외로…“
- 그들의 현주소…취업힘들고 빚 늘고

전국은행연합회에 따르면 7월 말 현재 신용카드 때문에 신용불량자로 등록된 161만9026명 가운데 20대와 30대의 비율은 각각 25.4%와 34.1%. 10명 중 6명은 ‘2030세대’란 뜻이다.

▽일단 쓰고 보자=서울 강남지역에서 부동산 임대업을 하는 부모 덕분에 몇 년째 놀고 있는 이모씨(25·여)는 매년 홍콩과 싱가포르로 3, 4차례 쇼핑여행을 다녔고, 여행 때마다 500만원이 넘는 명품을 신용카드로 사들였다.

2500만원이 넘는 연체금을 받기 위해 A신용정보업체의 박모 과장이 이씨를 찾아갔다. 그러나 이씨로부터 ‘내 돈 내고 내 물건 샀는데 왜 당신이 참견하느냐’라는 ‘황당한 이야기’를 들었다. 박 과장은 “이씨가 빚의 개념도 몰라 어이가 없었다”고 털어놓았다.

서울 A백화점에서 명품을 담당하는 홍모 과장은 “20, 30대 청년층 고객이 없으면 백화점 명품 매장은 유지되기 힘들다”고 말했다.

국민은행연구소는 지난해 말 ‘20대의 소비, 금융행태 보고서’를 펴냈다. 한국 대학생의 용돈을 포함한 월평균 소득에서 소비지출이 차지하는 비중은 86.4%로 미국 대학생(66.1%)이나 일본 대학생(72.2%)에 비해 월등히 높은 소비성향을 보였다.

국민은행연구소의 송훈(宋勳) 전문연구원은 “한국의 20대 젊은이 중 상당수는 경제적 문제에 있어서 부모로부터 독립하지 못한 ‘유아기적 속성’을 갖고 있다”며 “누군가가 해결해 주리라는 막연한 기대감 때문에 돈을 쓰는 데 두려움이 없다”고 분석했다.

▽‘전과(前科)기록’과 신용불량 리스트=올해 초 우수한 성적으로 서울의 명문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장모씨(27). 여러 대기업에 입사원서를 낸 끝에 3월 한 대기업에서 면접을 봤다. 이 회사 인사부에 다니던 대학 동아리 선배로부터 ‘합격이 확실하다’는 귀띔을 받고 친구들과 축하주까지 마셨던 장씨는 며칠 뒤 충격적인 전화를 받았다.

“선배가 ‘신용불량자로 등록된 적이 있느냐’면서 ‘아무래도 우리 회사는 힘들 것 같다’고 말하더군요. 지난해 소규모 사업을 하던 아버지가 내 이름으로 신용카드를 만들고 현금서비스를 받아 한동안 연체했던 게 문제됐던 겁니다.” 장씨는 그 후 대기업과 중견기업 20여곳에 원서를 냈지만 실패했고 이제는 거의 취업을 포기했다.

A대기업 인사팀의 박모 부장은 “신입사원을 뽑을 때 다양한 방법으로 신용에 문제 있는 사람들을 걸러내며 합격이 되더라도 급여통장을 만드는 과정에서 은행에서 ‘신용불량자’라는 사실이 확인돼 탈락시키는 경우가 많다”고 귀띔했다.

인터넷 채용정보업체인 잡링크가 최근 2000여명의 구직자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구직자 가운데 57.6%는 신용카드 대금을 연체한 적이 있었다. 연체자 5명 중 1명(20.6%)은 취업 과정에서 신용 문제로 불이익을 받은 적이 있다고 응답했다.

▽신용불량의 말로는 타락과 범죄, 자살?=“며칠 전 한 40대 후반의 엄마가 자신의 신용카드를 훔쳐 1000만원 이상을 쓴 20세 딸을 고소한 사건이 있어 5시간 걸려 설득해 간신히 돌려보냈습니다.”

서울 강남경찰서 조사계 김모 경장은 최근 조사계에 들어오는 20대 고소사건의 70∼80%가 신용카드 문제라며 “젊은 여성 가운데 일부는 돈을 갚기 위해 쉽게 돈을 벌 수 있는 유흥업소로 나가는 경우가 많다”고 밝혔다.

신용카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범죄에 빠지거나 자살하는 젊은이들도 늘어나는 추세다. 7월 초 신용카드 빚을 갚기 위해 초등학생을 유괴해 부모로부터 5000만원을 받아내려 했던 민모씨(24)와 박모씨(22)가 인천 연수경찰서에 붙잡혔다. 8월 말 경기 화성시의 한 민박집에서 최모씨(20·여)는 200여만원의 카드 빚 때문에 자살했다.

신용회복지원위원회 한복환(韓福煥) 사무국장은 “80년대 이후 한국 사회는 ‘소비가 미덕’이라는 식으로 사회 분위기가 흘러왔다”며 “청년 신용불량 문제는 정부와 금융기관, 사회, 청년층 모두의 책임인 만큼 이들이 빚에서 벗어나 정상적인 경제주체로 성장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특별취재팀

▼‘번 만큼 쓰기’ 청소년 교육 절실▼

“아픈 역사는 교훈을 남깁니다. 청년 신용불량자 양산 사태도 그래야 합니다.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청년 금융교육이 강화되는 계기가 돼야 합니다.”

금융교육 전문가인 강창희(姜敞熙) PCA투신운용 투자교육연구소장은 “청년 신용불량자 양산은 미국이나 일본이 이미 겪었던 일이고 우리도 한번은 거쳐야 했을 관문”이라며 “청년들이 이제 신용불량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온몸으로 느꼈을 것”이라고 말했다.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청소년들이 ‘번 만큼만 잘 계획해서 써야 한다’는 진리를 가르쳐야 하고 정부와 금융회사, 시민단체가 삼위일체로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에서는 1990년대 후반에 젊은층을 대상으로 한 금융교육이 대폭 강화됐다. 일련의 연구조사 결과와 사건이 직접적 계기였다.

미국의 민간 교육금융교육 전문기관인 점프스타트는 97년 고교 3학년 학생들의 금융지식 수준이 형편없는 수준이라고 발표했다. 같은 해 한 대학의 신입생이 카드 빚 부담을 이기지 못해 캠퍼스에서 자살한 것도 사회에 충격을 던졌다.

한국의 경우 ‘금융 교육’을 우선 받아야 할 곳은 정부와 금융회사라는 지적도 많다. 청년 신용불량자 양산에는 길거리에서까지 카드를 마구 발급한 카드회사의 과열경쟁과 이를 눈감아준 정부의 책임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이철순(李喆淳) 우리증권 투자전략팀장은 “개인뿐만 아니라 금융회사도 상품을 팔 때 수익에 따르는 리스크를 감안하고 정부도 적절한 규제를 통해 시장을 잘 감시 감독하는 계기가 돼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소비자인 청년 스스로의 각성이라고 전문가들은 강조한다.

원금과 이자를 갚을 한도 내에서 돈을 빌리는 것은 기본. 젊었을 때에는 돈을 모아 다가올 ‘재무 목표’(결혼 건강 자녀교육 자기개발 노후자금 마련)에 대비하고 사회인으로서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자신을 연마하라는 것이 금융 교육의 중요 내용이다.

미국의 유명 여성 재무설계사(파이낸셜플래너)인 수즈 오먼은 “진실은 돈을 만들고 거짓은 돈을 망친다”고 말했다. 실제로 가진 것보다 더 많이 가진 것처럼 믿거나 행세하고 살다가는 곧 밑천이 떨어진다는 뜻이다.

‘알려진 비용에 먼저 돈을 쓰라’는 말도 명심할 필요가 있다. 남에게 빌린 돈과 이자는 알려진 비용이어서 돈이 생기면 우선 빌린 돈을 갚아 비싼 이자에 돈을 버리는 일을 막으라고 오먼씨는 강조했다.

▼성장至上의 사회 아버지역할 실종▼

최근 몇 년간 젊은이들이 대거 신용불량자로 전락한 것은 성장만을 위해 달려온 한국 사회의 병리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아버지 없이 자란 세대’의 약점이 드러난 것이다.

아버지 없는 세대란 1970년대 이후 한국 사회 고도성장의 필연적인 결과다. 많은 아버지들이 중동의 건설현장 등 해외와 전국 곳곳의 산업 현장에서 일하느라 집을 비웠다. 이른바 ‘파더리스 소사이어티(fatherless society)’가 우리나라에도 찾아온 것이다. 서양이 300년 걸렸고 일본이 120년 걸려 이룩한 근대화를 박정희(朴正熙) 정부 18년 동안 이룩할 수 있었던 데에는 당시 세대들의 이런 노력이 큰 영향을 미쳤다.

자녀들은 아버지와 어머니에게서 각기 다른 덕목을 배우고 자란다. 아버지에게서는 도덕적 의식과 현실을 이기는 힘, 규율을 배운다. 반대로 어머니에게서는 감성적인 측면과 사랑을 배운다. 이렇게 아이의 인격이 형성된다.

그러나 아버지 없는 사회에서 자란 지금의 청년들은 아버지에게서 사회를 살아가는 데 필요한 규율을 배우지 못했다. 그 대신 아버지가 통장으로 부쳐 주는 넉넉한 생활비를 쓰면서 어머니 품에서 어렵지 않게 살아왔다. 그것이 비극의 발단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토양에 불을 붙인 것은 매스미디어와 정부, 금융회사들이 부추긴 사회의 소비 풍조다. 특히 방송은 건전한 소비 풍토를 만들어 나가야 할 본연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돈을 쓰고 사는 사회를 조장했다.

젊은이들이 어떻게 잘 살 것인지, 무엇이 정말 행복한 삶인지 우리 사회의 누군가는 계도를 해 주어야 한다. 미디어의 역할이 중요하다. 미래의 목표가 있는 청년은 시간을 만들어가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은 시간에 떠내려간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백상창 한국사회병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