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다 문득문득 목이 메어 와 갈피를 덮는 일은 요 몇 년 새 얻은 버릇이다. 사소한 일에 관심이 많다고 꽤 핀잔 듣는 처지이면서도 ‘조선조 문인 졸기’ 같은 책을 펼치는 일이 많다. 이 책은 ‘조선왕조실록’에서 이름난 문인들의 죽음을 다룬 구절만 가려 뽑았다. 세상에 이런 책도 쓸모가 닿는 곳이 있을까 생각했는데, 그 쓸모라는 게 결국 내 가슴을 울리는 일이었나 보다. 성종 때 태어나 연산군 때 죽은 박은(朴誾)이란 분에 대한 글이 눈에 들어왔다.
▼갸날픈, 덧없는 것들에 슬픔 ▼
“은은 고령 사람인데, 어려서부터 뛰어나게 총명해 글을 잘 지으며 기억을 잘하고 배우기에 힘써 18살에 급제했다…마음을 곧게 하고 행동을 바로 하여 늘 옛사람을 닮고자 했다. 문장에서는 타고난 것이 매우 높고 생각이 샘솟듯 해 그 시대의 글 잘하는 선비가 다 스스로 미치지 못한다고 여겼다.”
이 사람의 졸기(卒記)는 간단하다. ‘연지시살지 시년이십육(然至是殺之 時年二十六).’ 실록은 ‘왕이 (그 정직함을 미워해) 결국 26세 때 죽여 버렸다’고 간단하게 전한다. 실록이 전하지 않는, 그 열 글자 속에 숨은 스물여섯 살의 회한과 아쉬움과 슬픔을 헤아리는 것은 모두 내 몫이다. 카드결제일과 원고마감일 같은 것을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부족해 이런 것까지 마음속에 짊어지고 살아야 하니 여간 고달픈 인생이 아니다.
소설을 쓰다보면 결국 ‘然至是殺之 時年二十六’, 이 열 글자를 이기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히게 된다. 살아오면서 꽤 많은 글자를 써 왔지만 이 열 글자에 육박하는 글자를 쓴 적은 없었다. 큰 얘기에만 관심을 두던 20대가 지나니 삶의 한쪽 귀퉁이에 남은 주름이나 흔적이 보이기 시작한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 주름이나 흔적처럼 살아가다 사라진다. 머리로는 그걸 이해하지만 마음으로는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니 책을 읽다 문득문득 목이 메는 구차한 짓을 되풀이하는 셈이다.
목이 메고 마음이 애잔해지는 것은 모두 늦여름 골목길에 떨어진 매미의 죽은 몸처럼 자연스럽게 생기는 여분의 것에 불과한데, 지난 몇 년간 나는 거기에 너무 마음을 쏟았다. 이젠 알겠다. 역사책의 갈피가 부족해 거기까지 기록하지 않은 게 아니었다. 마음 둘 필요 없는 주름이나 흔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자꾸 그런 것들에 목이 멘다.
예컨대 윤치호의 일기를 읽다 보니 만세사건으로 온 나라가 떠들썩하던 1919년 9월 12일의 일기가 눈에 들어왔다.
“오후에 집에 있었다. 3시20분쯤 예쁘장하게 생긴 여학생이 찾아왔다. 조선인민협회 명의의 서한을 내밀며 조선 독립을 위해 자금을 대달라고 요구했다. 난 나 자신과 가족이 위험에 처할 수 있는 만큼 돈을 줄 수 없다고 말했다. 아울러 독립운동가들이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조선에 잠입하지 못하면서, 내게는 생명을 담보로 자기들에게 돈을 대라고 요구하는 게 희한한 일이 아닐 수 없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그녀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서한을 챙겨 가버렸다.”
일기는 여기서 끝나지만 내 마음은 그 예쁘장한 여학생을 따라 윤치호의 집을 나선다. 사라진 나라 대한제국에서 태어났을 그 여학생은 얼마나 실망했을까? 윤치호의 집 앞에 침이라도 뱉었을까? 아니면 도저히 넘을 수 없는 벽 앞에서 절망했을까? 윤치호의 변명을 듣는 순간, 그 여학생의 가슴속에서 꺼져버렸을 불빛. 나는 그 불빛을 상상하고 그 불빛에 매료되고 그 불빛에 빠져든다.
▼목메는 그 느낌 글로 옮기고파 ▼
태풍 ‘매미’가 상륙하기 전에 다녀온 제주도는 서울과 달리 여름과 가을 사이의 맑은 날이 이어졌다. 구름의 모양은 바람에 따라, 바다의 빛은 햇살의 각도에 따라 순간순간 바뀌어갔다. 사이에 있는 것들, 쉽게 바뀌는 것들, 덧없이 사라지는 것들이 여전히 내 마음을 잡아끈다. 내게도 꿈이 몇 개 있다. 그 중 하나는 마음을 잡아끄는 그 절실함을 문장으로 옮기는 일. 쓸데없다고 핀잔준다 해도 내 쓸모란 바로 거기에 있는 걸 어떡하나.
▼약력 ▼
△1970년생 △성균관대 영문학과 졸업 △‘달빠이 이상’, ‘사랑이라니, 선영아’,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 등 출간 △동서문학상, 작가세계문학상 등 수상
김연수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