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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도난담]美-英 명문대 진학하는 해외유학 자유화 1세대

입력 | 2003-09-18 16:34:00

자신의 고교유학 체험담을 나누고 있는 김상연씨(왼쪽)와 허창희씨. 이종승기자 urisesang@donga.com


초중고교생의 해외유학이 자유화된 지 올해로 4년째. ‘합법적으로’ 조기유학길에 올라 외국 고교에 진학한 1세대들이 올해부터 본격적으로 대학에 진학하기 시작했다.

비싼 학비를 댈 수 있는 부모라도 어린 자녀를 유학 보낼 결심을 하기란 쉽지 않다. 외국 명문대를 졸업하고 한국에 돌아오면 주류사회에 진입할 수 있으리라는 막연한 기대를 걸지만 현지 생활 속에서 자녀가 엇나갈 가능성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공교육에 대한 불신과 영어교육에 대한 열망으로 조기유학을 보내는 가정이 크게 늘고 있는 것 또한 현실.

허창희씨(20)와 김상연씨(19)는 그런 점에서 자녀의 조기유학을 생각하는 부모들에게는 부러움의 대상이다. 허씨는 미국의 5대 명문 사립고인 밀턴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시카고대 경제학과 진학을 앞두고 있다. 김씨는 이튼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영국의 명문고교 해로스쿨을 거쳐 런던 정경대 경제학과에 올 가을 입학할 예정이다. 새 생활을 시작하기에 앞선 8일 두 젊은이가 만나 고교 유학의 기회와 위기에 대해 털어놨다.

●성적을 뛰어넘는 그 무엇

김상연=안녕하세요. 형이 낸 책을 읽으며 와서 그런지 낯설지가 않네요. 나중에 책에 사인해주세요.

허창희=좋아.(허씨는 밀턴 아카데미 유학 초기부터 책을 낼 결심을 하고 일상사를 세밀하게 메모한 뒤 최근 ‘나 혼자 간 미국 고등학교 유학기’를 펴냈다)

김=저는 해외유학 자유화 1세대로 분류되긴 하지만 중학교부터 유학했기 때문에 고교 유학 1세대는 아니에요.

허=나는 정말 자유화 1세대야. 사실 학교 성적도 썩 훌륭한 편이 아니어서 예전처럼 자격심사를 받았으면 유학 가기 힘들었겠지. 고교 2학년 때 자퇴를 결심하고 내 손으로 준비해서 유학을 떠났어.

김=저는 부모님이 유학 절차를 다 준비해주셨어요. 혼자서 힘들었겠다.

허=인터넷으로 밀턴, 초트로즈메리홀, 필립 엑스터 같은 명문 사립고교에 대한 정보를 보고 e메일을 보내 원서를 받았어. 대부분 사립고교 입학검정시험(SSAT) 성적과 에세이를 요구했는데 SSAT 성적이 부끄러운 수준이었지. 그런데도 밀턴에 붙은 건 아마 인터뷰를 잘해서일 거야.

김=저는 학교장의 신뢰를 받는 교수가 저를 추천해서 중학교 입학이 순조로웠어요. 인터뷰는 어떤 식으로 진행됐나요.

허=미국 사립고교는 한국인 사이에 인기가 많아 몇몇 학교에서 홍보를 위해 한국에 오지. 1999년 겨울에 나는 밀턴 행사에 참가했고 인터뷰 신청을 했지. 흑인이 인터뷰를 진행했는데 당시 나는 농구와 힙합에 빠져 있어서 흑인을 동경했었어. 안 되는 영어로 손짓 발짓 해가며 ‘흑인을 만나서 기쁘다. 마틴 루터 킹 목사와 마이클 조던을 존경한다, 외세의 탄압을 딛고 자유를 쟁취한 흑인과 한국인은 결국 형제’라는 식의 이야기를 한 40분간 떠들었어. 그 사람은 “너의 성적이 어떻든 내가 널 뽑아주겠다”고 하더군.

김=고교 입학시험은 13세 때 봤어요. 중학교를 영국에서 다녔지만 성적도 별로 좋지 않았는데 명문고에 붙게 된 건 순전히 선생님들의 추천서 덕분인 것 같아요. 추천서는 ‘이 아이는 지금은 영어가 안 돼서 성적이 뛰어나진 않지만 매사에 열심이니까 고등학교에 진학하면 많은 것을 이끌어 낼 수 있을 것’이라는 식이었죠.

●라면의 힘

허=첫날 수업이 끝나고는 아주 미치는 줄 알았어. 나름대로 영어는 조금 한다고 생각했는데 완전 귀머거리 신세인 거야.

김=저는 멍하니 시계만 들여다봤었어요. 한국에서 회화학원도 다니고 일대일 교습도 받아봤지만 하나도 안 들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수업에 흥미도 없고.

허=그래도 수업시간에 딴 짓 하거나 멍하니 있으면 안 돼. 스스로 성실함을 보여야 주변에서 도와주거든. 나는 공포를 극복하고 과제를 열심히 하면서 선생님과 친구들에게 도움을 요청했어.

중요한 것은 미국에서도 인간관계이더군. 내겐 한국 음식이 많았는데 아이들이 라면을 팔라는 거야. 친구니까 그냥 줬지. 과자도 주고, 돈도 빌려주고. 개인주의 사회에서 그냥 주었더니 당장 친구 사이에 신뢰를 얻었어. 그러자 에세이를 고쳐달라면 쉽게 도와주더라고.

김=진짜 맞는 말이에요. 저도 친구를 사귀면서 영국사회에 적응하게 됐어요.

허=학점이 학기마다 높아지면서 부모님이 내 주신 학비가 아깝다는 생각이 덜 들더군. 사실 학비가 너무 비싸지 않니?

김=3년 고교생활에 9만달러 들었으니까요.

허=나는 1년에 3만5000달러나 됐어. 그나마 기숙사 생활을 했으니까 적게 든 편이지.

김=대학도 비슷하게 들겠죠? 부모님께 너무 미안해요.

허=나는 더 많이 들 것 같아. 학비와 기숙사비만 해도 4만달러인걸. 대학 학비를 마련할 시간을 벌려면 내년엔 군대를 가야지. 대책이 안서는데…. 그건 그렇고, 혼자서 생활하다 보면 마약 같은 것에 빠지는 아이들도 있지 않니?

김=영국에서는 만 16세면 담배를 살 수 있어요. 술은 18세부터죠. 마약은 금지돼 있지만 마음만 먹으면 학교 안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죠.

허=미국에서는 담배처럼 피우는 게 대마초야. 한국 유학생들은 외로우니까 유혹에 빠지기 쉬워. 내가 밀턴에 입학했다는 소식을 듣고 아이와 엄마가 상담하러 온 경우가 많아. 엄마 쪽이 말을 많이 하고 아이가 멍하니 있으면 그냥 돌아가시라고 하지. 마약에 빠져 삶을 망친다고. 아이가 화를 내면 그나마 가능성이 있는 것 같아 더 자세히 설명하는 편이야.

김=형은 담배나 술도 안 해요?

허=담배는 싫어하고 술은 좋아하는데 미국 법이 워낙 엄격해서 고교시절엔 하고 싶어도 잘 못했지. 야, 사실 했다고 하더라도 여기서 털어놓을 수 있겠어?

●미국 대 영국

김=최근 한국 여학생이 영국 대입자격고사에서 A를 6개 받고도 케임브리지에 떨어진 것을 두고 말들이 많죠? 옥스퍼드나 케임브리지면 당연해요. A가 7개였지만 케임브리지에 두 번 떨어진 사람도 알아요. 이들 대학은 시험 잘 보는 사람보다는 재능이 뛰어난 사람을 뽑기 때문이죠.

인터뷰가 중요한 것도 그 때문이에요. 케임브리지의 자연과학부를 지원한 제 친구는 ‘이 방안의 산소량을 추측해보라’는 질문을 받았어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문제를 주고 학생이 가진 지식을 동원해 어떻게 풀어나가는지 보는 거죠. 공기 중 산소 비율이 21%인 점, 방의 부피가 얼마인지, 방안의 사람은 몇 명인지 등을 다 고려해서 답을 추출하는 과정을 보는 거예요. 정답인지 아닌지는 상관없어요.

허=미국 대학에서는 수학능력평가시험(SAT·한국의 수능에 해당)을 봐. 영어 어휘력 시험이 진짜 어려워.

김=미국 대학을 가려고 했던 이유는 다양성 때문이에요. 영국은 아까도 말했지만 ‘타고난 천재’를 원하지만 미국은 다양한 경험을 존중하잖아요?

허=그게 바로 미국의 힘 같아. 그 밑바탕은 교육인 것 같고. 미국의 사립고교는 영국을 모방한 거지만 영국은 권위적인 데 반해 미국은 열려있어.

김=맞아요. 영국에서 고교의 마지막 2년은 자신이 선택한 세 가지만 공부해요. 이를 바탕으로 13학년 초(한국의 고교3년에 해당)에 대학 지원서를 내고, 이때 이미 전공이 결정되죠. 그 다음부터는 전공을 바꿀 수가 없어요.

허=미국은 12학년까지도 전 과목을 다 공부해. 대학에서도 과를 마음대로 바꿀 수 있지.

김=대신 일찌감치 진로를 선택한 사람들에겐 영국식 교육이 도움이 되겠죠. 대입자격고사의 점수를 미국 대학에서도 학점으로 인정해줄 정도로 고교시절부터 전문적인 공부를 하니까요. 그래서 옥스퍼드나 케임브리지는 학부가 3년밖에 안 되고 학부만 나와도 석사로 인정받아요.

김=형은 대학을 마친 뒤 귀국할 예정이에요? 내가 입은 교육적 혜택을 어떤 식으로든 한국에 풀어놓고 싶긴 한데….

허=그러면 좋겠지. 밀턴 인터뷰 때도 써먹었지만 킹 목사가 그랬어. “진리가 오랫동안 부정되면 진리 자체가 부정되는 것과 같다”고. 우리의 잘못된 교육상황도 그 말에 맞는 것 같아. 앞으로 우리가 할 일이 많아지지 않겠니.

정리=하임숙기자 arteme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