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센트럴역의 대합실. 한순간 이상한 빛과 함께 선글라스를 낀 중년 남자가 모습을 드러낸다. 남자는 우연히 주변에서 일어난 강도사건의 범인으로 경찰의 의심을 받는다. 그는 자신이 케이-펙스 행성에서 온 외계인이라고 주장해 정신병원으로 이송된다.
그의 이름은 ‘프롯’(케빈 스페이시). 진정제를 맞아도 전혀 반응이 없고, 인간이 볼 수 없는 자외선을 감지한다. 그런 점만 제외하면, 매우 정상적으로 보이고 천체학에 관한 한 전문가를 능가하는 해박한 지식을 자랑한다.
지구는 너무 밝아 늘 선글라스를 써야 한다고 말하는 프롯. 그는 정신병원에서 자신의 치료를 담당할 정신과 의사 마크(제프 브리지스)를 만난다. 그는 “케이-펙스는 지구에서 1000광년 떨어진 ‘라라’좌에 속해 있으며 빛 에너지를 이용해 초광속으로 이동해왔다”고 마크에게 설명한다. 마크는 처음 프롯의 말을 믿지 않지만 서서히 그에게 빠져들면서 그를 돕기 위해 애쓴다.
영화 ‘케이-펙스’는 프롯과 마크, 프롯과 다른 정신병자들과의 만남을 통해 방향을 찾지 못한 채 흔들리는 우리의 삶을 돌아보게 하며, 사랑과 관계맺기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판타지 드라마다. 전반부에서는 프롯이 외계인일까 탐색하는 과정을 통해 SF와 판타지, 코미디의 영역을 넘나들며 관객들에게 자잘한 재미를 느끼게 해준다.
‘모든 생명체는 치유능력이 있다’, ‘의사와 환자는 불편한 구분’이란 프롯의 대사에서는 동양적 사유가 느껴진다. 케이-펙스 행성에 대한 설명을 통해 진지한 주제의식도 읽힌다.
케이-펙스에서는 가족이나 결혼이란 개념이 없다. 모두 관계를 맺지 않고 각각의 개인으로 존재한다. 정부나 법도 없다. 그 말에 마크가 묻는다. “옳고 그름을 어떻게 따지죠.” 프롯은 너무나 뻔한 것을 묻는다는 표정으로 대답한다. “그건 스스로 생각해도 알 수 있는 거요.”
후반부에 넘어가면서 프롯의 미스터리는 하나씩 풀리지만 그럴수록 영화는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모호해진다. 마크의 끈질긴 추적을 통해 드러난 프롯의 기억들은 관객의 예상과 달리 사회적 메시지로 연결되기보다 개인 차원으로 함몰돼 작품의 힘을 빼기 때문. 다양한 이야기를 아우르기에는 각본과 연출력이 매끄럽지 못하다.
그럼에도 ‘아메리칸 뷰티’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은 케빈 스페이시의 연기력은 믿음직스럽다. 프롯의 신비한 이미지를 부각시키기 위해 미묘한 빛과 그림자를 활용한 조명과 카메라기법도 눈길을 끈다.
결국 이 영화에서 프롯이 외계인이냐, 아니냐를 가리는 것은 별로 중요치 않다. 마지막 장면에서 프롯이 남긴 말 한 마디만 제대로 가슴에 새긴다면….
“새 우주가 열려도 새로운 세상이 시작되지 않아요. 현재의 잘못은 미래에도 남는 거죠. 당신이 잘못한 것은 계속해서 남습니다. 지금 이 순간을 소중히 여기세요. 현재 없이는 미래도 없으니까.”고미석기자 mskoh11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