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신촌 지역에서 편의점을 운영하는 이계년(李桂年·32)씨는 자칭 ‘청년위기 1세대’다.
외환위기의 여파가 남아 있던 1999년 초 서울의 중위권 대학을 졸업한 그가 ‘만족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직장은 별로 없었다.
조그만 청소용역업체를 차렸지만 불경기로 곧 문을 닫았다. 그러나 좌절하지 않고 식품회사에 취직해 고추장을 파는 영업사원이 됐다.
▼연재물 목록▼
- 속출하는 신용불량
- 청년실업의 그늘
- 해외로…해외로…“
- 그들의 현주소…취업힘들고 빚 늘고
“회사에 들어가니 월급을 받으면서 일을 배울 기회까지 주더군요.” 이씨는 2001년 신용보증기금 지원금 등을 합해 지금의 편의점을 열고 재기를 다짐하고 있다.
한 출판업체의 광고영업직으로 일하는 차모씨(27). 올 3월 신용회복지원위원회의 신용지원대상자로 선정된 뒤 매달 월급의 절반이 넘는 81만3000원씩 카드 빚을 갚고 있다.
2001년부터 카 오디오업체에서 영업직으로 일하던 차씨는 거래처를 늘리려다 현금서비스를 쓰게 됐다. 한 개로 시작했던 카드는 ‘돌려막기’를 위해 8개까지 늘어나 무너질 위기에 처해 신용회복지원위원회에 도움을 청했다.
“여자친구요? 떠나 버렸어요. 카드 빚 다 갚을 때까지 3년간은 그런 생각 안하려고요. 그나마 신용불량에서 벗어날 길이 열린 것만으로도 날아갈 것 같아요.”
실업과 신용불량, 해외이민으로 대표되는 ‘2030의 위기’ 속에서도 모든 젊은이가 좌절하거나 범죄, 자살에 빠지는 것은 아니다. 이씨와 차씨처럼 희망을 잃지 않고 앞날을 찾으려는 젊은이도 적지 않다.
정부와 기업, 금융기관이 특히 자구(自救)의지가 강한 젊은이들이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적극 지원해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강조한다.
▽먼저 청년 스스로 노력해야 한다=청년들이 실업과 신용불량, 가치관 혼돈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우선 자구노력이 선행돼야 한다. 기업들에 무작정 신입사원을 더 뽑으라고 할 수도 없고, 은행과 신용카드사에 빚을 탕감하라고 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노동연구원 안주엽(安周燁) 연구위원은 “고용 여건은 산업 구조와 결부된 만큼 청년들이 먼저 인식을 바꾸려는 건강한 노력이 필요하다”며 “변화된 상황에 맞게 제대로 눈높이를 갖추라는 의미”라고 조언했다.
한국P&G 송동언(宋東彦) 인사담당 이사는 “반드시 대기업 취직만이 능사가 아니며 남이 안하는 틈새시장을 미리 선점하라”고 충고했다.
특히 실의에 빠진 청년들은 자신에 대한 불신이나 ‘될 대로 되라’는 식의 자포자기에서 벗어나 ‘회생(回生) 의지’를 보여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현재 신용회복지원위원회의 개인워크아웃, 시중은행의 신용불량자 구제 프로그램, 산업은행 등이 추진 중인 다중채무자 부실채권 정리 프로그램은 모두 ‘갚을 의지’를 전제조건으로 요구한다.
▽정부와 기업도 적극 나서야 한다=노동시장 경직성과 교육의 후진성에서 나오는 고용불안 등의 구조적 문제는 개인 차원에서 모두 해결하기 어렵다.
현재 정부의 ‘청년실업’ 대책에는 △인턴제(制) 확대 △국가 주도 일자리 창출 △취업 정보 활성화 △실업자 재교육 등이 포함되지만 아직 효과가 미미하다.
경희대 박수일(朴秀一) 취업정보실장은 “인턴제에 대한 학생들의 반응이 좋은 만큼 각 기업이 좀 더 인턴직을 늘리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기성세대 노동시장과 청년 노동시장을 분리하여 청년들의 고용형태를 보다 다양화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이렇게 하면 기업들은 보다 적은 임금으로 청년층을 많이 고용할 수 있고 청년층은 인적자본을 축적할 기회를 가져 적어도 ‘잃어버린 세대’로 전락하지는 않는다는 것.
특히 정부의 역할이 중요하다. ‘2030의 위기’를 해소할 궁극적 대책은 노동과 교육부문의 개혁, 경제의 전체 파이를 키우는 정책 등이라는 시각이 많다.
한국은행 이주경(李柱卿) 금융연구소 과장은 “청년의 희생을 바탕으로 기존의 고용안정을 유지하는 현행 노동시장 구조를 개혁하고 고학력 실업자를 양산하는 교육부문을 시장경쟁의 원리에 맞춰 전면적으로 재편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연세대 경제학과 정창영(鄭暢泳) 교수는 “정부가 기업들이 느끼는 불확실성을 제거하여 설비투자를 촉진하면 자연히 산업구조도 고도화되면서 젊은 인재를 위한 고급 일자리가 창출되고 인재의 해외 유출도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젊은층의 신용불량 급증 문제 역시 1차적으로는 본인 책임이지만 국가가 방관할 단계를 넘었다는 지적도 있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은 최근 내놓은 ‘신용불량자 대책 보고서’에서 “사적(私的) 회생제도는 한계가 있는 만큼 ‘공적 파산제도’를 활성화해 법원이 일부 청년들의 채무를 조정하는 방안도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끝-
▼외국의 경우는…‘인재개발-일자리창출’ 프로그램 다양▼
“외국 기업이 싱가포르 제조업 근로자 1명을 채용하는 비용으로 중국에서는 13명, 인도에서는 18명을 채용할 수 있습니다. 희생과 고통이 따르더라도 일자리를 늘리기 위한 개혁에 나서야 합니다.”
지난달 23일 고촉통(吳作棟) 싱가포르 총리는 기업의 연금 부담을 줄이고 임금 인상을 억제해 외국 기업의 투자를 늘리는 강도 높은 개혁 방안을 싱가포르 의회에 제시했다. 최근 중국 말레이시아 등 저임금 국가로 외국 기업의 투자가 이동하면서 실업문제를 걱정할 처지에 이르렀기 때문.
싱가포르 정부는 일자리 창출과 장기적인 인재 개발 프로그램 등을 청년 위기 해결책으로 내놓고 있다.
인구 400만명의 싱가포르는 고급 인력 수요가 많은 외국기업의 R&D센터와 아시아 지역본부 등을 적극 유치해 연간 2만∼2만5000개의 새로운 일자리를 마련하고 있다. 이렇게 만들어진 새 일자리의 75% 정도가 대졸 이상의 숙련 노동자를 위한 것.
또 해외 일류 대학의 비즈니스 스쿨을 유치해 청년층의 고급 인력을 자체 육성하고 있다. 이들 대학이 외국 기업의 아시아본부 등과 연계해 학생들이 경제 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도 제공한다.
능력에 맞는 대우를 받지 못해 해외로 떠나는 젊은이의 ‘두뇌 유출’은 국가 경쟁력을 약화시키는 또 다른 원인이다.
이에 대처하기 위해 아일랜드는 2001년 아일랜드과학재단(SFI)을 세우고 생명공학, 정보기술(IT) 등 10대 유망 분야의 젊은 과학자를 발굴하고 지원하는 등 기초과학 연구에 6억3500만유로(약 8384억원)를 투자하는 ‘두뇌 유출 방지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경제 성장의 원동력이 됐던 외국 기업의 투자가 동유럽 등 저임금 국가로 빠져나가자 해외의 젊은 두뇌를 유치해 경쟁력 있는 국내 기업을 육성하겠다는 포석이다.
대만은 미국식 주택과 거리, 외국인학교가 들어선 신주(新竹) 과학공업단지를 조성해 미국 내의 대만계 고급 이공계 인력과 해외 우수 인력을 불러오고 있다.
청년층을 위해 실업급여 등 ‘당근’만 내놓는 것은 아니다.
스스로 일을 하려는 의욕을 가진 청년이 노동시장에 진입할 수 있도록 국가가 나서서 취업 연수와 재교육, 취업 알선 등을 체계적으로 지원하는 나라도 많다.
영국의 ‘뉴딜 프로그램’, 독일의 ‘점프 프로그램’ 등이 대표적이다. 또 일본은 필요할 때마다 아르바이트를 해 생계를 이어가는 청년 실업자인 ‘프리터족(族)’이 일정 기간 기업이나 기술전문학교 등에서 취업 연수를 받도록 정부가 지원하는 제도를 마련했다.
외국의 청년실업 대책 및 청년 인력 개발 정책국가대책내용영국뉴딜프로그램1998년 시행. 청년 실업자를 위한 취업 알선 및 재교육 프로그램 진행. 이후 2년간 청년층을 위한 1만5000개 일자리 창출프랑스TRACE1998년 시행. 청년층을 위한 재취업 지원 및 직업 훈련, 고용 창출 프로그램 독일JUMP1999년 시행. 청년층의 직업 훈련과 취업 연수 기회 확대 아일랜드두뇌유출방지프로그램2001년부터 세계 수준의 해외 젊은 고급 인력 유치일본기업견습생제2003년 7월 도입. 청년 실업자를 기업의 유급 견습생으로 고용해 취업 연수기회 제공싱가포르맨파워21지식기반 경제에 맞는 고급 인력 양성
▼외국 CEO가 본 한국청년▼
내가 본 한국의 청년은 매사에 의욕적이고 새로움에 두려워하지 않는 적극적인 사람들이다. 그런 한국의 청년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한다.
실업률이 더 높은 유럽과 일본 등에서는 오래전부터 청년 문제가 심각한 사회 문제다. 이른바 ‘미래가 없는 세대’들은 돌파구를 찾는 일을 포기하거나 ‘신(新)나치즘’ 등 정치적 극단주의에 편승해 폭력적인 성향을 보이기도 한다.
한국의 청년 문제는 그동안 고도성장을 해온 경제가 성숙기로 접어드는 과정에서 발행한 불행한 현상이다. 그러나 나는 한국에서 유럽과는 다른 다행스러운 면들을 발견한다.
먼저 유럽처럼 젊은이들이 폭력적이 돼 문제를 일으키는 일은 아직 적다. 젊은이들이 해외로 나가려는 현상은 좋지 않은 현실을 극복하고 자신의 삶을 개척해 나가려는 적극적인 노력의 표현이기도 하다. 일본에서는 실업 등의 문제를 겪는 청년들이 집에 들어가 외부와의 연락을 끊은 채 사회로 나오지 않는 현상이 큰 문제다.
이 때문에 현실을 개선하려는 청년 개인과 기업 사회 등의 노력이 이어진다면 미래는 그리 비관적이지 않다고 생각한다.
우선 청년들은 포기하지 말고 희망을 가져라. 공부도 하고 꼭 기업이 아니라도 비정부기구(NGO) 등에서 봉사하며 외부 사람들과의 접촉을 꾸준히 하는 것이 좋겠다. 그렇게 쌓은 지식과 경험이 나중에 경력으로 인정될 수 있기 때문이다.
기업도 인턴 과정 등을 통해 청년들이 직장 경험을 할 수 있도록 유연성을 발휘해야 한다. 정부는 이 모든 것을 잘 지휘하고 관리해야 한다.
한국 경제가 과거와 같은 고도성장을 다시 하기 힘들다는 점을 감안하면 어느 정도의 청년 문제와는 함께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가만히 앉아 있으면 더 좋은 미래를 기대할 수 없다.
오이겐 뢰플러 하나알리안츠투신운용 사장·독일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