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음악에 파묻혀 지내는 안동림 교수. 그는 “세상에 따분할 틈이 있나. 하다못해 길거리의 여인네들 다리라도 연구해 봐라. 분명 재미있는 뭔가가 나올 거다”라며 ‘흥미를 갖는 삶’을 강조했다.권주훈기자 kjh@donga.com
원로 영문학자 안동림씨(71·전 청주대 교수)에게 “서재를 구경시켜 달라”고 전화했다. 안 된다며 손을 휘휘 젓는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이름난 장서가로 알고 있었기에 다소 의외였다.
“아파트로 이사 온 지 1년 되었는데, 아직 책 정리를 못했어요. 당장 들춰봐야 할 책도 한참 걸려 찾는 지경이야. 그냥 책 얘기 음악 얘기 하려면 와요.”
추석 연휴가 끝나는 일요일 오후, 서울 성북구 동소문동 공기 좋은 산자락에 있는 그의 자택을 찾았다.
책 두고 책 읽는 곳을 서재라고 한다면, 그의 서재는 두 개의 공간으로 나뉘어 있었다. 각각 3, 4평 남짓. 책이 ‘사는’ 방에는 양 편의 긴 벽이 책으로 빼곡했다. 주문 제작한 서가는 앞뒤 두 줄. 미닫이문처럼 책장에 바퀴를 달아 공간을 두 배로 활용할 수 있도록 했다. 방문 바로 옆 공간에는 클래식 음악 CD가 천장까지 꽉 차 있었다.
“책이고 음반이고 이사 올 때 반 이상 버렸는데도 이 지경이에요.” 그는 너털웃음을 지었다.
서가의 반 이상은 클래식 음악 또는 중국 고전을 다룬 영어 일어 서적이 차지하고 있다. ‘Musical Anecdotes(음악일화집)’ ‘觀音經講話’ 등의 제목이 눈에 띄었다.
그가 클래식 명반 탐구가들에게 필독서로 꼽히는 ‘이 한 장의 명반’(현암사) 저자이며, 93년 ‘장자’를 완역했고, 중국 고승들의 일화가 담긴 ‘벽암록’을 번역해 내놓은 사람이라는 점을 기억한다면 어색하지 않다.
분야를 가리지 않는 그의 왕성한 호기심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책이 그를 ‘만나는’ 공간으로 자리를 옮겼다.
영국제 앰프 옆에 지금은 찾아보기 힘든 LP(검은 옛 레코드판) 플레이어, 그 옆의 ‘검은 물건’이 눈에 익었다. “아 그거, 플레이 스테이션이야. 요새 게임에 빠져서.”
젊은이들 하는 첨단 게임은 못하고 ‘손가락 운동’ 차원의 게임이나 한다고 그는 말했다. LP 플레이어 위에는 클래식 DVD가 수북하다. 얼핏 보기에도 발매된 지 며칠 안 되는 신보들이었다. 모니터에서는 경호원을 소재로 한 TV 연속극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저 드라마 보십니까?”
“응, 보고 있지. 그런데 왜 저런 데까지 정치 얘기가 나와야 하나? 제대로 다루지도 못하면서.”
문득 그가 어깨를 툭 치며 “이것 봐” 했다. 이어폰이 달린, 우표만 한 크기의 최신 ‘오디오’였다. MP3 플레이어와도 다르다고 했다. 옆에 켜놓은 노트북 모니터에는 인터넷 서점 ‘반즈 앤 노블’ 사이트를 띄워놓고 있었다. 매달 30∼40권씩 해외 신간을 주문하는 데 사용한다.
요즘 읽는 책은? 주역에 빠져 있다. 중국인 학자 알프레드 후앙의 ‘완본 역경’(The Complete I Ching·1998)을 주 텍스트로, 일본인 오다 렌타로의 ‘역경강화’(易經講話) 등을 참조해 읽고 있다. ‘노자’ ‘벽암록’에 빠졌을 때 그랬듯이, 아무 속셈 없이 읽고 있으니 어떤 산물이 나올지도 아직은 알 수 없다고 했다.
“나? ‘잡놈’이오. 깊이 파지는 못해도 이것저것 기웃거리는 게 내 체질이야. 이런 기막힌 재미들이 책에, 음반에, 인터넷에, 어디나 있는데, 신나지 않아요?”
분명 그의 말은 뻔한 위장을 담고 있었다. 연속극이나 게임까지는 아니더라도, 손대는 분야마다 일정한 ‘깊이’를 획득하고 인정받고 있는 노학자가 부러웠다.
유윤종기자 gustav@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