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아니면서 모든 것인 나/최승호 지음/118쪽 6000원 열림원
‘彼岸이 거대한 아파트단지뿐인/한강/철교를 지하철이 건너가는 밤에/텅 빈 욕조에 들어앉아/홀로 노 젓는 시늉하는 사람이여,/시는 흘러가고/독자는 건너가는가’ (‘櫓’ 중)
시인 최승호(49)는 문명의 한가운데 서 있다. 문명과 시인의 관계는 ‘시큰둥하고 권태롭’지만 ‘그래도 결별은 없다’. 시인은 ‘자동차, 컴퓨터, 휴대폰, 그 광고들의 난리 속에서/내 피난처는 무심/그래도 피로와 적의 속에서 늙는다’(‘두엄’ 중)고 고백한다.
무심(無心)으로 숨어든 시인은 관조적인 시선으로 세상과 그곳에 속한 것들을 담담하게 바라본다. 가까이 가지 않고 먼 거리에서 바라보는 ‘절제’가 있다.
식탁에서 멸치를 다듬는 시인, 대가리를 떼어낼 때 까만 똥이 따라 나오는 멸치에서 ‘가을 오대산 우람한 전나무 길과 밤의 적멸궁을 에워싸고 있었던 칠흑 어둠을 생각한다’.
촛불과 좌선하는 고행자가 있다. 긴 백발에 비쩍 마른 그를 보는 순간 시인은 끔찍하다고 느낀다. ‘싸락눈 같은 눈알이 떨어질 듯 겨우 붙어 있어도/적멸이 두렵지 않은 멸치, 만약 적멸에/處所가 있다면/적멸은 지금 적멸궁뿐만 아니라/멸치 대가리와 말라빠진 똥 속에도 있을 것이다’ (‘멸치와 고행자’ 중)
올해 ‘미당문학상’ 수상작인 ‘텔레비전’이 놓인 시공간은, 붉은 단풍이 고산지대에서 내려오는 어느 가을날, 하늘과 바위투성이 개울이 존재하는 곳이다. 누군가 염치없이 내다버린, 껍데기만 남은 텔레비전이 ‘무슨 면목없는 삐딱한 영정처럼’ 개울 한 구석에 처박혀 있다. 빈 텔레비전에서는 서늘한 가을물이 흘러내린다.
시인이 어느 것에도 판단의 잣대를 대지 않고 그저 바라보는 이유는 ‘문을 열 때마다 낯설고 놀라운 풍경이 눈앞에 처음 펼쳐지는 것처럼’ 쓰고 싶기 때문이 아닐까.
조이영기자 lych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