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는 ‘철썩’ 하는 파도 소리로부터 누군가가 연상해 붙였을 것으로 짐작되는 김철석씨의 별명이다. 지금도 가끔 내게 전화를 걸어 “파돕니다” 하면 단박에 ‘파도=김철석’으로 연결되는 이분의 직업은 한국영화의 특수효과 담당이다. 42년간 수백 편의 한국영화 크레디트 타이틀에 그의 이름을 올렸다.
▼특수효과 42년 치열한 직업정신 ▼
그의 또 다른 별명 하나는 ‘투덜이’인데 이것은 내가 영화 ‘첫사랑’을 만들 때 가끔 현장에서 투덜투덜하는 그의 모습을 보고 붙여준 별명이다. 한번은 직접 “뭐, 불만 있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는데 얼굴까지 벌게져서 “감독님은 상관없는 일임다” 하고 완강하게 손사래를 치기에 그저 그의 버릇인 줄로만 알았다. 그러다 투덜거리는 진짜 이유를 알게 된 것은 한참 뒤의 일이다.
‘첫사랑’을 만들던 90년대 초 한국영화에서 ‘비’ 하면 소방호스를 들고 들입다 뿌려대는 소낙비 일색이었고, ‘바람’ 하면 역시 무조건 강풍기를 갖다대고 틀어대는, 말 그대로 강풍뿐이었다. 나는 그 속에서 김철석씨에게 소낙비 대신 이슬비를 주문했고, 강풍 대신에 산들바람을 주문했다. 꽃잎 하나가 날리는 것도, 골목의 깡통 하나가 분위기 있게 굴러가는 것도 특수효과가 책임져야 한다고 다그쳤다. 그러나 돈 없으면 정신으로, 맨몸으로라도 찍자고 이 사람, 저 사람 고생시킨 ‘첫사랑’의 흥행은 말 그대로 재앙에 가까웠다.
개봉 며칠 뒤,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 술 한잔 같이하고 싶다는 것이다. ‘콜라 한 잔 마셔도 취하는 사람이 웬 술? 흥행도 실패했으니, 예의 그 불평이라도 늘어놓으시려나’ 하는 마음으로 약속 장소에 나갔다. 자리에 앉은 그가 대뜸 한 말은 고맙다는 거였다. 영화를 어떻게 찍어야 하는 것인지 내게 배웠다, 자신이 현장에서 투덜거렸던 것은 나 때문이 아니라 정말로 감독이 찍기 원하는 것을 받쳐줄 수 없는 영화현실이 미웠기 때문이었노라고 고백성사 하듯 말하는 것이었다.
얼마 전 광고영화지만, 내심으로는 1분짜리 단편영화를 찍는다는 기분으로, 오랜만에 미국에서 진행되던 프로젝트를 뒤로 하고 서울에 들어왔다. 옛 동료들을 현장에서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즐거움도 마음 한 구석에는 있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스케줄 사정으로 함께 일하게 된 옛 스태프는 딱 두 팀, 분장과 특수효과뿐이었다.
사흘간의 촬영이 끝난 뒤 연출부로 참여한 M스쿨 학생들(내가 요즘 거주하는 뉴욕의 우드사이드를 한국인들은 목동이라 부르는데, 뉴욕의 영화전공 학생들이 우리 집에 들를 때면 ‘목동스쿨에 간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에게 소감을 물어봤다. ‘재밌었다’, ‘유익했다’는 상투적인 대답들이 오가다가 누군가가 이번 현장에서 제일 아름다운 사람을 봤다고 했다. “누구냐”고 물었더니 이구동성으로 “김철석씨”라고 답하는 것이었다. 젊은 자신들도 흙탕물이 튈까 망설이곤 했는데 그분은 흙탕물 속이건, 어디건 뛰어다니며 ‘비’ 하면 달려가서 소방호스 잡고, ‘바람’ 하면 강풍기를 틀더라는 것이다.
그날 밤, 김철석씨와 오랜만에, ‘첫사랑’ 이후로는 처음으로 술 한잔 했다. 투덜거리는 것은 여전했지만, 술이 늘었고 이제는 검은 머리가 하나도 없었다. 술이 한 잔 들어가고, 내가 곧 미국으로 돌아간다고 하자 그는 “감독님 아니면 누가 나처럼 늙은 사람을 현장에 불러주겠느냐”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이번 현장에서 제일 멋있는 사람은 ‘파도’였다고 합디다”라고 말해줬지만, 요즘 현장을 둘러보면 정말로 나이 든 사람이 없다.
▼젊은 영화판 때론 ‘경륜’ 아쉬워 ▼
영화배우 박중훈씨도 가끔 만나면 하는 이야기가 자신이 어떤 때는 현장에서 제일 연장자라는 것이다. 마흔도 안 된 녹음기사조차 젊은 감독들이 자신을 구닥다리로, 혹은 부담스럽게 생각하는 바람에 그만둬야겠다고 하는 이야기는 나로서는 이번에 한국에서 들은 가장 충격적인 것이었다. 현장이 젊어진다는 것이 어찌 나쁜 일이랴마는 가끔은 아름다운 파도가 필요할 때도 있지 않을까?
이명세 영화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