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든 인생에 상전벽해(桑田碧海)와 같은 변곡점은 있다. 하지만 기회를 내 것으로 만드는 일은 생각만큼 쉽지 않다.
고교 감독출신인 '무명' 권성세(46) 감독이 2000시드니올림픽 참패직후 남자유도의 '구원 투수'로 임명된 것은 누구에게나 충격이었다. 당연히 권 감독 체제가 단명에 그칠 것이란 예상이 줄을 이었다. 하지만 3년이 지난 지금 권 감독은 최근 끝난 오사카세계선수권대회에서 역대 최고의 성적(금메달 3개)을 한국에 안겼다.
권 감독의 성공신화는 요즘 유행하는 복권처럼 인생역전의 드라마가 아니다. 그를 만나 애기를 나누는 순간 누구나 그의 유도 열정에 빠져들고 만다.
▽지도자는 천직
권 감독은 유도를 처음 시작했던 서울 배명중 2년 때부터 배우기 보다는 가르칠 기회가 많았다. 보성고 시절 건강이 좋지 않은 감독을 대신해 후배들을 가르쳤고 인하대 시절에는 감독이 국가대표 감독을 맡는 바람에 사실상의 코치역을 맡아야 했다. 선수시절 내내 후배들을 지도한 기억밖에 없다는 것이 그의 회고.
지도자 생활 시작도 빨랐다. 고교 졸업 뒤 곧바로 전매청에 입단, 2년간 선수생활을 하다 군복무를 마친 27살 때 뒤늦게 대학에 입학한 권 감독은 대학 3년 때인 84년 모교인 보성고 코치에 임명됐다.
이미 비공식 지도자로 다년간 내공을 다진 권 감독은 코치를 맡은 첫 해 성곡컵대회에서 모교에 37년만의 우승컵을 안겼다. 2000년 국가대표 감독을 맡아 보성고를 떠날 때까지 '14년 연속 우승'에 '47연승'이란 전무후무한 기록이 그를 따라다녔다.
"유도는 공식기술만 210가지입니다. 평생 배워도 다 못 배울 정도지요. 그래서 끊임없이 공부하지 않으면 못 가르칩니다."
▽'우리가 고등학생입니까'.
권 감독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좋은 재목이 지도자를 잘못 만나 선수생명이 일찍 끝나는 것. 그래서 그는 새 선수를 만나도 처음 6개월 동안은 어떤 기술이든 자유롭게 연습하고 흉내내게 내버려 두고 관찰한다. 대부분의 감독이 자신이 좋아하는 스타일과 기술을 선수들에게 강요하지만 그는 철저하게 선수들의 입장에서 생각한다.
이런 권 감독도 예외를 두지 않고 선수들을 다그치는 게 한 가지 있다. 바로 '예'를 강조하는 유도에서 선수들이 갖춰야 할 기본적인 품위다.
'도복띠를 풀지마라' '머리는 항상 단정히 깎아라' '슬리퍼를 신고 다니지 마라' '후배들을 때리지 마라' '비겁하지 마라' 등. 권 감독 밑에서 유도를 배우는 순간부터 선수들은 이 말을 귀에 못이 박힐 만큼 듣고 또 듣는다.
자존심 강한 국가대표 선수들이 반발하지 않을 리 없다. 하지만 권 감독의 말대로 자신의 주변을 깨끗이 하자 점차 주위에서 보는 눈이 달라졌고 이제는 선수들이 스스로 몸가짐을 바르게 하기 위해 노력한다.
"저는 선수들에게 항상 '너희들이 최고의 엘리트'라고 가르칩니다. 평소 생활에서 내가 가장 잘났다고 생각하고 그런 교육을 받아야 시합에서 질 경우 수치심을 느끼지 않겠습니까?".
▽'한우물만 파라'
최근 권 감독은 보성고 출신으로 모 대학 감독을 맡고 있는 한 제자를 크게 질책했다. 박사학위 준비를 이유로 선수 지도를 소홀히 했다는 이유. 한창 배워야 할 나이의 선수들은 지도자가 잠깐 한 눈을 파는 사이에 금방 망가진다.
권 감독에게 '지도자는 최고의 전문직'이지만 '선수의 심부름꾼'이란 마음가짐으로 하지 않으면 안되는 직업이다. 두 가지 일을 할 만큼 한가하지 않다는 것이다.
권 감독은 세계선수권대회를 앞두고 선수들에게 대결이 예상되는 선수들의 비디오를 최소 100번은 보도록 했다. 상대가 손가락 하나를 움직여도 다음에 무슨 동작이 나올지 머릿속에 그려져야 한다는 것이 이유.
▽최소한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가장 좋은 기술
일선 지도자들은 선수들이 연습하면서 힘들어 하면 만족한 표정을 짓는다. 훈련 효과가 컸다는 판단에서다. 하지만 권 감독의 생각은 반대다. 지도자는 어떻게 하면 선수들이 최소한의 힘으로 최대의 효과를 얻을 수 있을지 연구해야 한다는 것.
그는 초보 지도자 시절부터 '힘 안들이고 기술을 익히는 법'을 밤낮없이 연구했다. 그래서 그의 제자들은 수비보다는 공격 위주의 플레이를 펼치고 좌우, 앞뒤, 위아래 기술에 모두 능하다.
권 감독은 선수들에게 휴가를 준 지 4일만인 21일 태릉선수촌에 선수들을 소집했다. 큰 대회를 마친 선수들이 들뜬 기분에 술과 유흥으로 몸이 망가지는 것을 우려해서다.
"아테네올림픽 금메달 후보요? 세계선수권대회 만큼은 할 자신이 있는데 이름은 말 못해요. 꼽히지 않은 선수는 자존심이 상할 거 아닙니까. 7체급 모두 금메달 후보입니다."
김상호기자 hyangsa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