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초로 에베레스트 정상에 올랐던 영국의 등산가 조지 맬러리 경은 “산이 거기 있기 때문에 산에 오른다”고 말했다.
그러나 생태사진작가 정봉용씨(63)는 다른 이유로 매일 북한산을 찾는다. 그는 새가 거기 있기 때문에 산에 오른다.
오랜만에 맑게 갠 19일 오전 정씨와 함께 북한산을 찾았다. 정씨에게 북한산은 이제 안방처럼 익숙한 곳이지만 92년 처음 산에 오를 땐 약해진 건강을 되찾으려는 단순한 의도였다. 그러던 정씨의 인생은 어느 날 우연히 만난 박새 수컷 한 마리 때문에 180도 바뀌었다.
19일 서울 북한산 산턱에서 생태사진작가 정봉용씨가 북한산의 까막딱따구리와 맺은 인연에 대해 얘기하며 활짝 웃고 있다. -변영욱기자
“냇가로 조그만 새 한 마리가 날아와 물장구치듯 포드닥거리는 거예요. 넋을 잃고 바라보다 ‘아, 이게 내 일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새는 고사하고 사진도 전혀 몰랐던 정씨가 새를 찍겠다고 나선 건 그때부터였다. 정식으로 배운 적은 없지만 좀 안다 싶은 사람만 있으면 찾아가 머리를 조아리길 수년 째. 이젠 전문사진작가도 놀랄 만큼 촬영 실력이 뛰어난 그를 주위에선 ‘새 박사’라고 부른다.
정씨가 세상에 알려진 건 2000년 4월 북한산 소귀천 계곡에서 발견한 천연기념물 242호 까막딱따구리(사진) 한 쌍 때문. 강원도 산간지방에서도 쉽게 볼 수 없는 까막딱따구리가 정씨에 의해 서울에서 발견돼 조류학계가 큰 관심을 나타냈다. “그날 꿈이 비범해 목욕을 하고 절에 들러 불공도 드렸죠. 산에 오르다 이상하게 끌리는 오동나무가 있어 살펴보니 새 둥지가 분명한 커다란 나무구멍이 있는 겁니다.”
그때부터 정씨는 새벽부터 밤늦도록 그곳을 지켰다. 그러기를 한 달 남짓, 드디어 까막딱따구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후 정씨는 까막딱따구리의 생애를 사진에 담는 것을 자신의 과제로 여기고 있다. 그가 북한산 지킴이 노릇을 하는 것도 새를 지켜야 할 의무가 자신에게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3년째 북한산 산턱에서 자신만의 사진전을 열고 있는 정씨는 10월 3일부터 서울 강북구 우이동 솔밭공원에서 ‘까막딱따구리 생태사진전’을 연다. 벌써 어왔지만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게 하자는 주위의 권유로 장소를 옮기게 됐다.
“새에 미친 사람이 별것도 아닌 일에 매달린다고 생각해도 좋습니다. 다만 제 사진들을 보면서 저런 희귀한 새가 사는 북한산을 소중히 여기려는 맘이 들면 그걸로 족합니다.”
정씨는 마무리 단계인 까막딱따구리에 관한 글을 책으로 엮고 북한산에 까막딱따구리를 위한 비석을 세울 계획이다.
까막딱따구리에만 신경 쓰면 식구들이 섭섭해하지 않느냐고 묻자 그는 “까막딱따구리도 제 식구입니다”라며 웃었다.
정양환기자 ra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