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티모르에 유엔평화유지군(PKF)으로 활동 중인 상록수 부대원들이 4월 경기 광주시 특전교육단에서 열린 환송식에서 파이팅을 외치고 있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미국의 이라크 추가 파병 요청을 놓고 국가적인 논란이 뜨겁다. 파병을 하는 것과 하지 않는 것 중 국익에 부합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이를 결정하기 위해선 정부가 베트남전쟁 이후 몇 차례의 해외 파병을 통해 ‘얻은 것’과 ‘잃은 것’을 냉철히 분석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역대 파병의 득실을 점검해 본다.
▽베트남전 파병=최초의 해외파병인 베트남전 파병은 1964년 9월 미국과 베트남의 공식요청에 따라 의료진 130명과 태권도 교관 10명 등 비전투요원을 국회의 동의를 얻어 현지로 보낸 것이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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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후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미국은 65년 추가 파병을 요청해 왔고 박정희(朴正熙) 정부는 야당 등의 거센 반대를 무릅쓰고 66년까지 청룡, 맹호, 백마부대 등 3개 사단을 잇달아 파병했다. 73년 종전 때까지 연인원 32만여명이 참전했다. 파병이 정점에 올랐던 68년의 경우 한국은 5만여명을 파병, 미군(총 55만여명)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병력을 투입했다.
당시 정부의 파병 명분은 ‘자유세계 수호’였다. 남베트남 등 아시아의 공산화를 막고 6·25전쟁 때 미국 등 자유세계에 진 빚을 갚는다는 것이었지만 실제론 경제적 동기가 결정적이었다.
한국은 미국과의 협상에서 파병의 대가로 각종 경제적 이익 확보에 총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체결된 ‘브라운 각서’는 △한국 기업과 노동자의 베트남 내 경제 활동 보장 △3억달러 규모의 각종 차관 등 대한(對韓) 경제원조와 기술이전 확대 △한국 상품에 대한 미국시장 개방 확대 등을 보장했다.
72년까지 연 32만명의 군인이 보낸 송금액은 2억달러 이상이었고, 파병기간 중 전사자와 부상자에 대한 보상금은 6500만달러였다. 이 돈의 대부분은 경부고속도로와 한국중공업 등 경제기반시설을 짓는 데 사용됐다.
파병을 계기로 상사(商社), 건설, 서비스업 등 70여개의 한국 업체들이 남베트남에 진출해 72년까지 약 2억3800만달러의 외화를 벌어들이는 ‘특수’를 누렸다. 7년간의 파병으로 한국은 총 10억3600만달러의 외화를 벌어 최빈국에서 개도국 대열로 진입할 수 있었다.
군사 부문의 이익도 간과할 수 없다. 미국의 직간접 군사원조의 증대로 방위산업 육성과 장비 근대화를 이룬 한편 실전 경험을 바탕으로 군사전략과 전술을 체계적으로 습득해 개발할 수 있었다. 한국군의 국제적 지위 향상도 뒤따랐다.
외교 부문에선 미국의 방위공약이 확고해져 해외자본의 투자와 차관 공여를 촉진시키는 계기가 됐다. 또 국제사회에서 도움만 받던 국가에서 도움을 주는 국가로 위상이 바뀌었다.
반면 ‘잃은 것’도 많았다. 파병 장병 중 5000여명이 사망하고 1만6000여명이 부상하는 등 막대한 인명 피해를 냈다. 이 때문에 베트남 파병은 젊은이들의 피를 대가로 경제적 이익을 챙긴 ‘용병 거래’라는 비판을 받았다. 또 전쟁 중 미군이 뿌린 고엽제로 파병 장병과 2세 등 5만여명이 아직도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경제면에선 정부와 일부 기업의 밀월로 ‘베트남 재벌’이 탄생해 산업 구조가 재벌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또 전쟁 초기 한국의 주요 수출품인 철강제품, 화학비료, 기계류 등의 주요 공급자가 일본이었던 탓에 대일 무역의존도가 심화됐다는 지적도 있다.
이 밖에 박정희 정권은 파병으로 인한 미국의 지지를 기반으로 반공과 안보 이데올로기를 동원해 국내 정치를 장악했다는 비판도 있다.
▽기타 파병=베트남전 이후 해외파병은 91년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으로 걸프전이 터지면서 재개됐다.
유엔 결의로 다국적군이 구성되고 전후 복구사업 참여를 위해 참전이 필요하다는 여론이 일자 노태우(盧泰愚) 정부는 의료지원단(154명)과 공군수송단(160명) 등 비전투요원 314명을 파병했다. 5억달러 규모의 군사지원도 했다. 일부 정치권과 재야 운동권에서 파병 반대를 주장했지만 파병 동의안은 큰 반발 없이 국회를 통과했다.
이후 파병은 유엔의 결의로 구성된 다국적군이나 유엔이 직접 지휘하는 유엔평화유지군(PKF)의 비전투원 위주로 진행됐다. 90년대 중반부터 최근 이라크 파병에 이르기까지 한국이 다국적군으로 참가하면서 부담한 직접적인 파병 비용은 1000억여원.
이 무렵의 파병에선 미국 주도의 새 세계질서 합류, 한미간 군사동맹의 확인,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경제력에 걸맞은 역할 담당 등 외교적 명분이 우선시됐다. 따라서 국가 이미지 제고, 한국군 위상 강화, 세계 평화 기여 등 무형의 성과가 컸지만 베트남 파병과는 달리 경제적 실익은 별로 없었다.
역대 해외파병의 득실일시파병규모비용부담결과65∼73년 배트남전, 전투병 주축 5만5000여명, 연인원 32만여명미측 부담10억달러 외화획득 및 한미동맹강화 통한 국가위상제고, 군사력 현대화 및 실전경험. 다수 사상자와 고엽제 후유증 피해, 반공 이데올로기 고착91년 1∼4월걸프전, 비전투요원 314명(의료지원단 154명, 공군수송단 160명)약 100억원, 5억달러 전비분담금 지원1000만달러 규모의 전후복구사업 수주, 세계평화에 능동적 기여 및 군사지원분야 경험 획득94년 9월∼서부사하라 유엔평화유지군(PKF)으로 비전투요원 20명(의료지원단, 연인원 440명)유엔이 부담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 경제력 규모에 걸맞은 역할 분담, 인도주의에 입각한 대외적 국가 이미지 제고, 한국군의 국제적 위상 제고 및 군사지원 분야 경험 축적99년 10월∼PKF, 동티모르에 전투병 250명(치안유지요원, 6개월 주기 , 연인원 3200여명)다목적군 임무기간(약 330억원),이후 유엔이 부담2001년 12월∼아프간 대테러전쟁, 비전투요원 240여명(해공군 수송지원단, 연인원1200여명)약 366억원2002년 2월∼아프간 대테러전쟁, 비전투요원 96명(의료지원단, 연인원 285명)2003년 2월∼아프간 대테러전쟁, 비전투요원 150명(건설공병단, 연인원 150명)2003년 5월∼이라크전 비전투요원 675명(건설공병단 575명, 의료지원단 100명)1년간 약 354억원(예정)인도주의에 입각한 국가이미지 및 군 위상 제고
윤상호기자 ysh100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