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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포석 人事의 세계]권력기관-국정원분석관

입력 | 2003-09-23 18:02:00

1998년 8월 21일 국가안전기획부 정규직원 공채 원서 접수 창구에 몰린 지원자들. 당시 안기부 직원 공채에는 무려 1만5000여명이 지원했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1982년, 국가안전기획부는 중앙정보부란 이름으로 창설(1961년)된 이래 처음으로 신문에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직원채용 공고를 냈다.

그 전에도 채용 공고를 낸 적은 있지만 막연하게 ‘공무원 채용’이란 식의 문구로 위장한 탓에 채용 주체가 어디인지도 모르고 응시한 사람도 없지 않았다고 한다.

안기부가 자신의 이름으로 채용공고를 낸 데에는 배경이 있다. 간부 한명이 미국 뉴욕 타임스에 난 중앙정보국(CIA) 요원 모집 광고를 보고 “우리도 이런 식으로 해야 한다”는 아이디어를 냈던 것이다.

CIA 요원 모집 광고는 이랬다. “당신은 몸이 건강한가. 당신은 모험을 좋아하는가. 당신은 해외여행을 좋아하는가. 당신은 나라를 위해 일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CIA에 지원하라.”

국가정보원 간부 A씨는 이 일화를 소개하면서 “CIA 요원 모집 광고에는 해외 정보수집과 공작을 전문으로 하는 요원이 갖춰야 할 자질이 그대로 들어있다”고 말했다.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전쟁, 이라크전쟁 때 미리 현지에 잠입한 CIA 요원들이 공격대상과 위치를 알려줘 정밀한 타격을 할 수 있었다는 일화에서 보듯, 정보기관 요원은 기본적으로 위험한 일을 능히 감당할 수 있는 강인한 심신 즉, ‘무인(武人)기질’을 갖춰야 한다는 것이 그의 견해다.

우리 국정원의 상황은 어떤가. 국정원에 대한 인식 개선과 취업난이 맞물리면서 요즘 국정원 직원 채용에는 내로라하는 수재들이 몰려 100 대 1, 200 대 1의 경쟁률을 보인다. 외국대학 박사학위 소지자, 사법시험 또는 행정고시 합격자 등도 적지 않다. 국정원 관계자 B씨는 “성적이 중시되다 보니 ‘책상물림형’들이 아무래도 많이 합격하게 된다”고 말했다.

‘책상물림형’은 정보의 분석 가공 면에서 실력을 발휘할 가능성이 큰 만큼 대체로 ‘분석관’으로 배치된다. 분석관은 정보 분석 외에 윗사람의 입맛에 맞게 보고서를 만드는 업무도 하기 마련이다. 윗사람을 상대하는 이런 업무 특성으로 인해 국정원에서는 분석관들이 대접 받는 풍토가 있다고 한다. 국정원 관계자 C씨는 “분석관들은 업무상 외부에서 활동하는 수집관, 공작관들이 보고하는 정보에 대한 평가권한까지 갖는다. 이렇게 권한이 크다 보니 분석관들은 전통적으로 진급이 빠른 편이다”고 말했다.

‘학식 많은’ 분석관들이 실력으로 잘나가는 것을 탓할 일은 아니다. 그러나 은연중 ‘문인(文人) 기질’이 우대되는 이 같은 분위기가 국정원을 전반적으로 문약화하는 부작용을 낳고 있다는 게 국정원 사정에 정통한 인사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전직관계자 D씨의 설명. “특히 선진국에 파견되는 해외공작요원(공작관)은 국정원 사람이면 누구나 한번쯤 근무하고 싶어 하는 자리다. 인기가 있다 보니 정보수집·공작 전문부서 사람들뿐 아니라 분석관들도 꽤 지원하고 실제 선발되기도 한다. 공작이라는 특수업무를 수행할 요원의 선발이 전문성과 관계없이 이뤄지는 경우가 있다는 얘기다.”

물론 분석관 출신이라고 해서 해외업무를 못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들의 경우 현지 활동이 ‘공작형 정보’보다는 ‘분석 종합형 정보’를 수집하는 데 치중하는 경향이 있는 데다 공작업무 미숙으로 일을 그르치는 경우도 없지 않다는 것이 D씨의 설명이다.

보직 형평을 기한다는 이유로 분석관과 공작관을 넘나들거나 국내파트와 해외파트를 오가기도 하는 식의 이 같은 인사 관행은 국정원이 기본적으로 외교관이나 민간 상사원은 하지 못하는 ‘특수공작’을 하는 조직이라는 점을 무시한 데에서 빚어졌다는 얘기다. 또 다른 전직관계자 E씨는 “정보 분석업무도 중요하다. 그러나 공작과 비밀정보 수집은 더 중요하다. 전쟁에서 전략수립을 하는 사람도 필요하지만, 최종 승패는 결국 전투병에게 달려 있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다. 그러나 그런 기본이 종종 무시되는 게 국정원의 현실이다”고 말했다.

분석관은 분석관대로 해외연수 등을 통해 정확한 정보 분석 기법을 배우도록 하는 등의 방법으로 전문성을 키우도록 하고, 수집관이나 공작관은 그들대로 인사에 대한 걱정 없이 활동할 수 있도록 사기를 북돋워주는 인사정책이 필요하다는 것이 관계자들의 조언이다.

윤승모기자 ysmo@donga.com